<별의 목소리>와 신카이 마코토

2021. 4. 12. 06:1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언젠가 태성오빠에게 생일선물로 받았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의 목소리>를 읽었다. 그 때는 오빠가 외국에 나가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지금으로부터 6년 전(25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완독을 시도했지만, 나의 뻣뻣한 감성으로는 이 책이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신파로 느껴진 탓에 읽다 그만두기를 계속 했다. 그러다 웬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이번 봄, 완독을 했다. 그것도 재밌게.

 

이 책에는 우주와 지구에서 떨어져 살게된 중학생 소녀와 소년이 나온다.

누구 하나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고, 하교를 하고,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소녀는 중학교를 미처 졸업하기도 전에 외계인의 흔적을 조사하기 위한 우주탐사계획의 멤버로 선발돼 우주로 떠나게 된다. 문자 메세지는 갑자기 아득하게 떨어져 지내게 된 두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도구였다.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사람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소녀가 경험하는 30분은 소년이 경험하는 1년이었다. 그런데다가 소녀는 화성에서 목성으로, 명왕성으로, 지구에서 더 멀리 떨어진 행성으로 이동했다. 그럴수록 메세지가 전달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습격해 온 외계인과 전투를 하던 소녀는 태양계에서 시리우스로 워프를 하게 된다. 가는 법은 알려져 있지만 돌아오는 법은 찾지 못했다고 알려진 시리우스. 그곳에서  소녀는 조금 더 일찍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우주로 떠난 소녀가 그렇듯, 지구에 남아있는 소년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소녀가 시리우스로 타임워프를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당시 소년은 이미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되었다. 그 사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진학했고 몇 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하지만 소녀가 보낸 문자 메세지를 읽은 뒤 자신도 우주로 향하기로 마음 먹는다. 

 

마음이 슬퍼 잠에 들지 못하던 새벽에 책장을 펼쳤고 흩날리는 벚꽃잎 사이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책장을 덮었다.    

아득하게 떨어져 살게 되면서도 끝내 서로를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어떤 사람을 계속 떠올렸다. 책 속에서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향해 보내는 절절한 그리움과 걱정이 내가 그 친구에게 갖는 감정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언젠가 그 친구가 '너무나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이 새로 나왔는데 함께 보고 싶다'고 하여 보았던 <언어의 정원>과 이 책에 담긴 감성이 너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에 찾아보니 웬걸. 그 이가 신카이 마코토였다는 사실을 5년이 지난 지금 알았다. 장마가 막 지나간 후덥지근한 여름 날 <언어의 정원>을 보며 너무도 좋아하던 그 친구의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선 여전히 선명해서,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어루만져보듯 그 날의 기억과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가슴에 아릿하게 남는 감정들을 찬찬히 오래도록 느껴보았다. 

 

원작 애니메이션 역시 찾아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책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애니메이션이 먼저 나오고 소설이 뒤늦게 나왔다는데, 책 안에 담긴 에피소드와 감정선들이 아무래도 훨씬 정교하고 풍성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의 결말은 훨씬 열려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책을 먼저 읽고 애니메이션을 봐서 그랬던 것인지 애니메이션의 결말을 본 뒤 충격에 사로잡혔었다. 분명 열린 결말로 읽었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도대체 내가 뭘 본거지?! 왜 때문인거죠 감독님? 하지만 분명한건 2000년도 초반 25분 남짓한 애니메이션을 이 정도 퀄리티로 혼자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가 괴물은 맞는 듯. 제작자로서의 능력도 섬세한 감성도 정말 부럽다.

 

이 책을 통해 태성오빠에 대한 이해도 조금 더 할 수 있었다. 오빠는 이 책을 읽었을 때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었다고 했다. 오빠가 시나리오를 쓸 때 마다 '별'을 소재로 자주 삼곤했던 것이 어쩌면 이 책의 영향 때문이었을런지도.

 

내 우주선을 건드리지 마! 돌아가고 싶어. 리시테아... 리시테아가 없어지면 나는 완전히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몇 년이 걸려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지구에 가까워지고 싶어. 부탁이야! 우리를 내버려둬! 이곳에는 있고 싶지 않아. 내가 있고 싶었던 곳은- 그래, 여름 구름, 차가운 비, 가을의 바람. 우산을 때리는 여름 비, 부드러운 봄의 흙. 한 밤 중의 편의점의 빛... 방과 후의 서늘한 공기. 한 밤 중에 트럭이 지나가는 아득한 소리. 소나기의 아스팔트 냄새. 그 것이 내 세계. 내 세계.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야. 그 풍경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와 함께 그것을 느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풍경. 사랑스럽다. 그것이 사랑스러운 것은 그와 함께 느꼈던 것이니까. 나는 노보루와 함께 수많은 풍경을 느끼고 싶었어.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그러니까 부탁해. 

 

 

타르시안은 내게 찔릴 때마다 피를 흘린다. 피를 흘려도, 몸을 잘려도 다시 다가온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아플 텐데. 죽을 텐데. 어째서 하염없이 상처를 입히고 상처 입는 것일까. 아파. 나는 아픔을 느끼고 있었따. 타르시안이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을 느껴서 그 아픔이 내게 옮아온 것 같다. 피가 난다. 아파. 그만해! 아파! 어째서 상처를 입히려 하는 것일까. 어째서 상처를 입으려 하는 것일까. (중략) 나는 마음의 아픔이 생기는 곳과 같은 곳에서 다정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나는 깨달았다.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같은 풍경.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 당신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구나. 같은 감정이 솟아오르게 하는 같은 풍경을. 당신들은 나를 사랑하는 거구나. 그래서 함께 같은 풍경을 보고 싶다고 느꼈던 것이다. 같은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아름다움도, 감동도, 아픔도. 아아, 나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다.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아파하고, 외로워하고, 같은 곳에 있고, 그 어떤 곳도 이곳이다. 세계, 우주, 풍경,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세계는 훨씬 넓은 것이었다는, 단지 그것뿐이었다. 

 

 

메세지가 적힌 뒤 1년. 미카코가 이것을 쓴 때로부터 이미 1년이 지났다. 미카코도 그것을 알고 있다. 미카코는 읽히는 것이 1년 후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쓴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단 1년 사이에 미카코를 느끼려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미카코는 지금도 아마 헤어진 아픔을 계속 느끼고 있으리라. 나는 단지 메시지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미카코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해버렸다. 연락이 없으면 곁에 없으면, 현실감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니. 엄청난 어리광이고 엄청나게 둔한 감각이다. 나는 공룡처럼 무신경하다.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치 돌처럼 무감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인간은.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싶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떤 것이 보이는, 더 잘 보이는 눈이 있었으면 좋겠다.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을 느낄 수 있게 되는 센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더 높은 해상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고 싶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이해하고 싶다. 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더 커다란 것을 볼 수 있도록.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음악을 함께 덧붙인다. <별의 목소리> 노르웨이의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