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6. 01:04ㆍ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교문을 나서다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면서, 그 아래서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사진 찍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하교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지금이 '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봄이구나!"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그 시간을 누리려고 긴 산책을 했다. (이 글에 첨부한 사진은 산책길에 촬영한 것들이다.)
물론 그간 봄이란걸 몰랐던 건 아니다. 2월 달력을 넘기면서, 겨울 내내 입고 다닌 외투를 옷장 속으로 넣으면서, 황사 등으로 공기의 질이 너무 좋지 않을 때 "작년 봄에는 공기가 좀 깨끗했었던 것 같은데"와 같은 말들을 사람들과 나누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중학생이 된 꾸러기들을 만나면서, 지금이 21년의 3월이고 그렇게 다시 봄이 시작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봄'이라는건 단순히 달력 상 숫자가 바뀐다고 으레 오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좀처럼 쉽게 만나기 어려운 파란 하늘, 잔잔한 바람과 따듯한 햇살, 여기저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 여린 연두빛의 잎을 피워내는 나무들, 새 학년이 된 아이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생기와 활력, 다시 북적이기 시작하는 오일장과 하루가 다르게 다채로워지는 싱그러운 봄나물들, 봄의 음식들로 차려낸 밥상, 들과 산에서 쑥을 뜯는 사람들, 산책하러 나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천변. 이런 풍경들을 만날 때에서야 비로소 봄을 만끽하는 기분이 들지 않던가.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암만 화사한 봄 꽃 속에서 파묻혀 있다고 해도, 사는 이의 마음이 한 겨울에 묶여 있다면 그 이가 머무르고 살아내는 계절을 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는 봄을 흠뻑 만끽하고 누릴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봄을 '봄'이라고 느꼈던 그 찰나의 순간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내가 깨달은 것은 내가 꽤 오랜 시간 동안 봄을 '봄'으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20대 후반을 통과하는 동안, 나는 늘 한 겨울 속에 있었다. 화사한 꽃밭에서도, 따가운 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화사할 나이인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고 말했고 나는 그런 말 앞에서 위축되고 주눅들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30회차 정도 진행된 지금의 시점)의 정신분석은 그런 내게 봄맞이 대청소와 같은 작업이 되어주는 것 같다. 겨우내 묵었던 먼지들과 털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어 공기를 바꾸는 일.
앞선 분석이 낙엽을 모두 떨궈내고 벌거벗은 채로 겨울을 맞는 나무와 같이 그간 삶을 뒤덮고 포장해왔던 낡은 습성과 위선을 떠나보내고 민낯의 나를 마주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 시간이었다면, 요즘의 분석은 오히려 아주 작고 여린 새 잎을 틔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시간이 '버리기'에 집중돼 있었고 그로 인해 조금은 여유가 생겼으니, 이제는 '세우기'로 에너지가 향해 가는 느낌이랄까. 물론 떠나보낸 줄 알았던 것들이 여전히 삶에 곳곳에 남아 있고 여전히 그것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고 속상해지기도 하지만(분석가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펑펑 울기도;;), 결국엔 굳게 맘 먹으며 새로운 봄을 위한 새 잎을 피워내려고 힘을 내게 된다.
얼마 전 분석가가 내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 스스로에게 비겁하지 않고 싶습니다."
어쩌면 때로는 봄의 생기가 익숙하지 못해서, 약동하는 봄의 생명력 앞에서 스스로가 초라해보여, 익숙한 겨울로 돌아가고 싶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겨울을 떠나 새로운 계절로 걸어가겠다고 다짐하고 발을 뗐으니 더 이상 지나간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설령 돌아가는 길이 있다고 해도 돌아가서도 안된다.
올해는 봄을 보다 봄답게 맞아보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뿌린 과감한 선택과 결단의 씨앗을 잘 보살펴 풍성하게 길러내는데 사력을 다하는, 어쩌면 꽃의, 나무의, 농부의 마음으로 보내는 봄 말이다.
- 여담 -
작년 가을과 겨울 동안 붙들고 왔던 여러 편의 글들과 음악들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작년 뿐만 아니라 근 10년 동안(최소 6~7년) 나를 지탱해온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그것들로부터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이겠지만, 그리고 결국 또 어느 시점에는 다시 만나겠지만...
특별히 이 글을 적으면서 생각냈던 신영복 선생님의 글과 나희덕 시인의 시,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아래에 붙인다. (글에서 겨울 이야기를 해서 특별히 더 생각났던 것 같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16
신영복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겨울의 한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꼬마들과 온 가족의 기쁜 새해를 기원합니다.
1984.12.28.
도끼를 위한 달
나희덕
이제야 7월의 중반을 넘겼을 뿐인데
마음에는 11월이 닥치고 있다.
삶의 기복이 늘 달력의 날짜에 맞춰 오는 건 아니라고
이 폭염 속에 도사린 추위가 말하고 있다
11월은 도끼를 위한 달이라고 했던 한 자연보존론자의 말처럼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어떤 나무를 베야 할지 알게 되고
도끼날을 갈 때 날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면서
나무를 베어도 될 만큼 추운 때가 11월이라 한다
호미를 손에 쥔 열 달의 시간보다
도끼를 손에 쥔 짧은 순간의 선택이,
적절한 추위가,
붓이 아닌 도끼로 씌어진 생활이 필요한 때라 한다
무엇을 베어낼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의 잡목숲을 들여다본다
부실한 잡목과도 같은 生에 도끼의 달이 가까웠으니
7월의 한복판에서 맞이하는 11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도끼자루를 다잡아보는 여름날들
Rachmaninoff: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
피아니스트 조성진 님이 연주한 버전을 거의 매일 끼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 > 지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you are what you choose (feat. 마당에서 점심식사) (0) | 2021.04.23 |
---|---|
<별의 목소리>와 신카이 마코토 (0) | 2021.04.12 |
대전시립합창단 정기연주회를 다녀오다 (0) | 2021.03.20 |
김조년 교수님과 <홀로 그리고 함께> (0) | 2021.03.03 |
낮과 밤의 러닝(feat. 러닝 입문기) (0) | 2021.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