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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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정호승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2023.10.21 -
개소리의 향연
이 글은 정말 아무말 대잔치로 적은 것이다. 1. 종로에서 빈대떡과 육회를 포장해 온 날 이번 주 서울을 다녀오며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종로에서 엄마의 갱년기 약과 광장시장의 음식을 포장해 온 것. 날이 더운데도 불구하고 육회와 빈대떡 반죽을 포장해(드라이아이스 팩을 여러겹 덧대서) 내려온 것을 본 엄마는기함을 했지만, 다행히 음식은 멀쩡했고, 맛있는 음식을 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타지의 유명한 음식점에 들러 음식을 포장해 오는 것이 나의 루틴 아닌 루틴이니) 식구들에게는 이 상황이 익숙하고 의미부여할 만한 일은 아니었을 수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가족과 맛있는걸 같이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서부터 근 1.5kg 가까운 음식을 드라이아이스로 밀봉해 갖고 내려온 것이었고, 심지어 그 과..
2022.05.25 -
근황
#1. 오랜만에 용규, 종호오빠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며 술 한 잔을 했다. 남동생이 있었다면 넷이 함께 봤겠지만 하필 동생은 그 시간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세 사람이 회동을 했다. 두 사람과 알고 지낸지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이 편안하고 편안했다. 용규오빠의 두 아이는 벌써 꽤 많이 자랐다(4살, 2살). 용규는 요즘은 수박을 수확하는 현장에 나가 불철주야 일을 하는데 업무량이 너무 많아 평일에도 늦게까지 일을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마음 아파하고, 육아로 힘들어 하는 와이프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토로하는 오빠를 보니 '여전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
2022.05.22 -
올 한 해의 가장 중요한 계획이 틀어지고
1. 올 한 해의 가장 중요한 계획이 틀어졌다. 악재가 겹치고 겹쳤고, 그 과정에서 내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머리는 복잡하고 맘은 산란하고 우울한 날들이 며칠 지속됐다. 그러나 오히려 정말 중요한 것은 명징해지는 듯 했다. 2.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자괴감을 느꼈던 날엔 선욱과 이야기를 했는데 선욱은 생각보다 심플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엔 분석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석가는 다시 작년 초가을처럼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물었고, 상상할 수 있는 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였으며, 자신이 서른 셋에 내린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더 이상 이 질문 앞에서 비겁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3. 명랑하고 즐겁고 행복..
2022.05.12 -
부치지 못한 편지
안녕, 그리운 사랑. 네 삶에서 나는 진작 잊혀진 사람이었겠지만 그 동안 너를 잘 떠나보내기 위해, 잘 헤어지기 위해서, 나 정말 많이 노력했어. 너와 연애한 시간이 나에겐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난 너를 통해 내 삶에 가장 귀한 것들을 배우고 경험했어. 네가 준 모든 것에 감사해. 동시에, 그 때 네 마음이 어땠을지, 네가 내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해야했지만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너무 늦게 이해하게 되어서 정말 많이 미안해. 우리 연애의 끝은 좋은 날보다 아프고 힘든 날이 많았지만 내가 네게 줬던 상처들이 잘 아물었기를, 그 시절 보다 더 많이 행복해졌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 3년의 연애, 3년 6개월의 이별 그 모든 시간 동안 너를 늘 사랑했고, 네 존재를 소중하고 감사하게..
2022.05.08 -
멍청하지!
#1. 어제 저녁에는 친구와 차를 마셨다. 한 세 시간 남짓 수다를 떨었는데 간만에 친구를 본다는 점을 빼고는 감흥이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친구는 여전히 밝고 맑은 기운이 가득했는데 왜 그랬을까? 물론 어제 분석가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내가 변했기 때문일텐데 그럼 나는 어떻게 변한걸까? 몇 가지 짐작을 해보면 이렇다. 1) 나의 지적 열망이 줄어들었다. → 친구의 지적 호기심과 열망에 공감이 안된다. 2) 자신의 '진짜 욕망'에 대해 엄격하게 생각하고 검열한다.→ 친구가 자신의 욕망에 진실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친구가 친구의 남친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에 대하여.) #2. '진짜'가 아닌 것들은 힘이 없다는 사실이 기죽게도 했다가 힘 나게도 한다. 나 스스로는 그 누구보다 내 삶에 낀 '가짜'와 ..
2022.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