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2022. 5. 22. 14:16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1. 오랜만에 용규, 종호오빠와 만나 저녁 식사를 하며 술 한 잔을 했다. 남동생이 있었다면 넷이 함께 봤겠지만 하필 동생은 그 시간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세 사람이 회동을 했다. 두 사람과 알고 지낸지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이 편안하고 편안했다.

 

용규오빠의 두 아이는 벌써 꽤 많이 자랐다(4살, 2살). 용규는 요즘은 수박을 수확하는 현장에 나가 불철주야 일을 하는데 업무량이 너무 많아 평일에도 늦게까지 일을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마음 아파하고, 육아로 힘들어 하는 와이프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토로하는 오빠를 보니 '여전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머리카락이 급속도로 빠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종호오빠는 여전히 등산을 다니며 즐겁게 살고 있는 모양이고, 용규오빠의 팀에 새로 합류한 '정규직 전환 근로자' 문제에 대해 의미있는 지적을 해주었으며, 대학시절 만난 '구제불능인 친구'와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 했고, 매우 집중력 있게 용규 이야기를 들었으며, 요즘엔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 속 대사 중에 특별히 인상 깊었다며 소개해준 구절에 매우 공감이 갔다.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그들은 말로 끼를 부리거나 관심을 받기 위해 '진짜'가 아닌 '가짜'를 아무 생각 없이 뱉는 사람들이 아니고, 서로에 대한 '진짜' 애정을 갖고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기 때문에 선을 넘지 않는다. 감정적인 흥분도, 조소도, 욕동이 서로 얽히고 얽혀 빚어내는 지저분한 관경도 전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하고 편안할 수 있는 것.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올 수 있어 충만했고 기뻤다. 고마워!

 

 

#2. 주중에는 익산에 있는 토마토농장으로 촬영을 다녀왔는데, 그 곳에서 만난 농장주가 매우 좋은 기운과 태도를 갖고 계신 분이었는데 그 분을 보며 요즘 나의 생활과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그런 기운을 닮은 사람이고 싶었다. 

 

 

#3. 화요일에는 김조년 교수님도 오랜만에 뵙고 왔다.

 

미소네 밥상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는데 그곳을 다녀올 때면 음식으로 대접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종희 선생님께서 준비한 식사가, 미소네 밥상의 식사가, 언젠가 도현과 유진이가 차려주었던 식사가 그러하듯. 세상에는 사람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음식과 밥상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충만함을 선사하는 만남이 있다. 그러한 시간의 빈도를 늘려야 겠다. 

 

식사를 마치고는 옹달샘터에서 교수님과 차담을 나누었다. 교수님은 냉장고 속 온갖 맛있는 간식을 내어주셨고 나는 어미새의 밥을 받아 먹는 아기새 마냥 교수님께서 주시는 온갖 맛있는 간식들을 낼름 낼름 집어 먹었다. 

 

 

#4. 지역 내 중학교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두 번에 걸쳐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첫 시간에는 말을 듣지 않는 한 여학생 때문에 진땀을 뺐고 두번째 시간에는 학생들이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든 만남이 끝난 뒤, 앓아 누웠다.

좋은 교육자, 좋은 어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이 계속 되면 나도 언젠가는 좀 더 어린 친구들을 '잘' 만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5. 일은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끝 마쳐야 한다는 것. 그것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책임감이 강한 프로페셔널들과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강박적일 정도로 집요하고 치열하게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들 앞에서는 내가 이 일을 정리하려고 맘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할 수가 없다. 

 

 

#6. 양돈농가에 촬영을 다녀온 이후론 고기 먹는 일이 어렵고 심할 때는 괴롭다. 살이 빠져서는 안되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철제 케이지 속에서 오로지 앉고 서고, 새끼들에게 젖먹이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어미 돼지를 보는 일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웠다. 또한 돼지들이 먹는 사료는 오로지 그들을 살찌우게 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고 형태 또한 불쾌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을 먹고 큰 돼지들을 내가 다시 먹는다는 상상을 하니 깊은 곳에서부터 역한 기분이 올라왔다. 

내가 먹는 음식의 원형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길러지는 환경을 직접 본다는 것은(즉,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상 위에 올라온 음식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고민을 하지 않는 태도는 나 자신을 비롯해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로는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한살림에서 장을 보면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을 느꼈다. (50%세일 하는)미나리 한 단, 자유분방하게 자란 쥬키니 호박 한 개, 명란젓, 명이나물, 식혜 한 병, 잡곡을 샀는데 아주 맘에 쏙 든다. 미나리, 호박, 마늘, 익힌 샐러드를 자주 해먹는데  혼자 먹기 적은 양은 아닌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적은 양의 음식을 신중히 고민해서 장바구니에 담고, 음식을 아껴가며 요리를 하는 것, 그리고 천천히 맛있게 먹는 것. 그게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되어 준다. 

 

#6. 시간이 될 때면 부모님과 밤 마다 걷는다. 어떤 날은 10km, 어떤 날은 8km, 짧게 걷는 날은 6km. 그 시간들이 귀하다. 짧게 나마 대화가 오가고 기분이 리프레시 되는 시간들. 그것들이 사람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