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같지 않은 날, 어린 시절 자란 동네 산책을 했다.

2021. 5. 12. 05:49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요 며칠 동안은 속상하고 답답했다.

내 딴에는 잘하려고 용을 쓰는데도 정작 일은 내 맘 같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게 다반사였다. 크고 작은 일 가리지 않고 그러했다.

죽을 둥 살 둥 애를 쓰는데도 끊임없이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겼고 그 때 마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것은 이제는 경험칙으로 '잘 안풀리는 시기',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내 맘 처럼 되지 않는 않은 날들도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가까스로 최소한의 평정심과 여유는 지키며 일상을 해나갔다는 것이다.

 

오늘도 그 연장선 위에 있는 하루였다.

수업을 하러 갈 때도 사무실로 돌아올 때도 버스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오전 나절을 꼬박 고생했는데  

특히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를 무려 세 번이나 잘못 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아주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 근처에 다다르게 됐다. 

'오늘은 영 바퀴 달린 것과는 인연이 아닌가보다'고 생각하고

기왕 이렇게 된 것,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둘러보고 집까지 걸어가자고 맘 먹고 산책을 하였다.

 

너무 어린 시절 살던 동네,

그래서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혹여나 당시 살던 집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가물가물한 기억의 이 곳 저 곳을 살피며 동네를 걸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어릴 적 살던 나의 집, 정원이 딸린 양옥집의 옥탑방.

 

나는 내가 살던 곳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다른 집 앞에 서서 (마음 속으로)'이 곳이다!'고 외친 것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우연히 저 집의 앞을 지나면서 이 곳이 내가 살던 곳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몇 개 안되긴 하지만 다음의 기억들이 단서가 되었다.

 

- 어린 내가 오르기에는 계단이 높아 온 몸으로 기어서 계단을 올랐다는 것.  난간을 잡지 않으면 계단 뒤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기 일쑤였다. 

- 계단 중간 쯤에 양옥집 주인 아주머니가 들락날락 하시는 문이 있었다는 것. 

- 계단 옆으로 사람이 하나 지나갈 수 있는 너비의 통로 같은 공간이 있었다는 것. 실은 그 공간을 기억한다기 보다는 어떤 특정한 사건 을 기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내가 대여섯 살 쯤 되었을 때 일일 것 같다. 모르는 남자 행인이 대문 바깥에 바짝 붙어 선 채로 계단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불러 집에 어른이 계시냐고 물었다. 부모님이 잠깐 외출했다고 대답하니 자기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그런데 계단 아래에 있는 화장실을 쓸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그 때 내가 문을 열어주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 주인집에 정원이 있다는 것. 옥탑에서 그 곳을 내려다보면서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동네의 많은 집들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빌라들이 신축되는 가운데에서도

아직까지 내가 살던 집과 동네의 많은 풍경들이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이고 감사했다. 

어린 내가 엄마 손을 잡고 뛰어다녔을, 네 발 자전거를 타고 달렸을 그 골목 골목을 둘러보는 시간은 

내 까마득한 어린 시절을 둘러보는 시간이기도 하여 더욱 귀했고 가슴 뭉클해지는 데가 있었다.

 

이 오래된 동네가 아직까지 빌라에 잠식되지 않고 주택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특히 눈길 주는 여기 저기 마다 싱그러운 초록의 생명들을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마당이 있는 집치고 커다란 나무 없는 집은 없는 것 같았는데,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러겠지만) 이 나무들이 한 눈에 봐도 수령이 꽤 된, 듬직하게 자란 것들이 대부분었다. 

마치 그것들이 각각의 집을 지키는 정령처럼 느껴졌다.

마당이 없는 집들은 제각기의 방식으로 화분에 식물들을 기르는데 그 역시도 하나하나가 전부 사랑스러웠다.

이런 크고 작은 생명들이 이 동네를 지켜주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차, 여유가 넘치는 이 동네 고양이들 이야기도 해야겠다.

사람일랑 무서워하지도 신경쓰지도 않고 제 할 일 하는데 치중하는 녀석들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녀석들이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놀랄까봐 슬쩍 지나쳐 걸어왔지만 아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싶었다.

 

내 맘 같지 않았던 덕분에 계획에 없던 산책(산책이면서 동시에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을 하게  되면서, 참 행복했다.

동네 곳곳을 걸으면서 떠올렸던 시가 산책이 끝난 후에도 계속 생각이 난다.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

 

인간이란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받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