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3. 13:51ㆍ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1. 중요한 순간에 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 것은 엄밀히 말해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내가 아닌 그 여자를 부른 것(다시 말해, 그의 앞엔 내가 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다른 여자를 향해 발화된 말, 즉, 그 여자를 호명한 것.)'이라고 분석가는 단호하게 말했다. 진실이 드러나는 위기의 순간마다 '좋게 좋게'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어 핑계거리를 찾아 상황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합리화하며 진실을 외면할 것이냐는 지적이 예리하게 마음 속으로 파고 들었다. 지난 주 '사랑한다면 상대를 위해서라도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부드러운 조언 뒤에 붙어있었던 분석가의 말이 계속 가슴을 찢어놓았다. (오빠가 '정말 실수였다'고 한 말에 대해 정말 사랑한다면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줘야 하는 것이 아닌지, 본인이 '정리됐다'고 말하는데 내가 '정리가 안된 것 같다'고 뺀찌 놓을 자격이 없지 않느냐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오만한 월권 아니겠느냐는 나의 말에) 분석가는 다음의 메세지로 답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민지씨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여자를 갖다 놓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지씨만큼은 허락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라 민지씨 자신의 일인데요? 도대체 어디가 자격이 없고 월권이라는 건가요? 그리고 민지씨 보다도 남자친구 본인이 그런 자신의 행동을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요? 그 분이 민지씨를 사랑하기 때문에도 그래서야 안되겠지만 본인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가선 안되지요."
2. 분석가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가까운 남자들은 모두 내게 같은 이야기를 건넸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이 관계에 문제가 생겼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들은 더욱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어제 종호와 용규를 만났을 때 역시 그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들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1) 지금 이 상황은 단순한 '이름 실수'(단순히 전 여자친구의 이름을 부른 것)가 아니며 (2)남자들이 그렇게 중요한 순간에 그런 종류의 실수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 (3) 그 사람의 실수가 '마음 정리가 된 상태라면', '그 사람에 대한 맘이 남아 있지 않는다면' 무의식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4) 정말 내가 소중했더라면 전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종류의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용규는 계속 걱정이 됐는지 둘이 따로 좀 걷자 하며 '결혼은 안된다'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언젠가 송과 연애가 끝난 뒤 용규가 새벽에 전화를 걸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주던 날이 생각나서, 같은 자리에 있던 종호에게 '너희 커플은 서로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며 별 일 없으면 그대로 결혼하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에게 하는 말과는 너무 대조돼 서글펐다.
3. 내가 이 상황을 못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1) (올 봄과 같이)폭식을 하며, (2) 균열과 붕괴에 대한 꿈*을 계속 꾸고, (3)사건 당시에 느낀 불쾌함이 번번히 일상 생활을 침습해 들어오고, 그 때 마다 나는 무기력해지고 (4) 아주 사소한 지점에서 그에 대한 의심이 피어오른다. 그래서 결심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우리가 계속 연애를 한다고 해도 불화의 씨앗을 안고 갈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가 헤어지든 만나든, 만약 만난다고 해도 정말 건강하고 장기적인 관계를 맺어나가기 위해서는 언젠가 이 부분은 정확히 짚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러면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 비겁해지지 않겠다는 것.
* 앞뒤가 끊긴 도로가 지반 침하로 가라앉는데 탈출이 불가능하다거나, 술 취한 남자가 나를 뒤쫒아 오는데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들이 없어 안전에 극도의 위협을 느끼거나, 방 탈출에 실패한다거나, 찢긴 상처가 벌어진다거나 등.
4. 나는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가 많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러한 노력이 이미 균열이 간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별 소용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복잡하고 깊은 상처가 났고 관계의 중요한 것에 균열이 갔다고. 내가 이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회복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동시에 오빠 역시 본인의 맘에 대해 찬찬히 들여다 봤으면 좋겠다고. 오빠가 정말 그 사람에 대한 마음 정리가 끝났다면 미안한 마음까지도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오빠는 내가 요청한 '쿨링다운 할 시간'에 대해서는 '당연히 OK'를 했으나 본인에게 요청한 사항에 대해선 '이미 결론이 났다'는 입장을 전달하며 내게 '필요 이상의 의미부여'는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감정적으로 크게 자극했다. 내가 요청한 사항에 대해 무 자르듯 거절을 한 그의 마음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형태의 백업은 거절하면서 '네 불안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예를 들어 연락을 자주 한다거나)'하고 묻는 그의 얘길 듣는데 엉뚱한 곳에서 삽질하려고 한는 생각만 들었다. 비싼 마사지숍을 데려가고 예쁜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보다, 나는 내가 필요하고(거짓말 하지 말 것, 전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할 것) 원한 것(네 마음을 잘 점검해볼 것)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망할. 나는 그에게 크게 화를 냈다. 마지막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당시 거짓말을 일삼았던 상대에게 화를 낸 이후론 처음으로 타인에게 언성을 높힌 것이라, 나는 전화를 끊고 심한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렸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언성을 높혔다는 사실 때문에 나란 인간이 너무 못나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조금은 '서툰' 그를 한번 더 '믿어주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일까? 품어 안을 순 없는걸까? 엄청난 절망감이 몰려왔다.
이 관계에서 상처는 그가 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한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냈는데, 그는 '이름이 비슷해서 한 실수였다'며 한번만 믿어달라는 말 이외에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니... 심하게 화가 난다. 더불어 그저 내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면 자신은 그 처분에 따르겠다는 묘하게 수동적인 태도가 거욱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다.
5. 분석가도 주변의 친한 남자선배들이 모두 물었다. 너 그 사람 사랑하니? 응, 나 그 사람 사랑해... 잘 지켜내고 싶어. 그런데 나 역시 내가 어떤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지- 신뢰의 회복-을 잘 알고 있다.
6. 분석가 말대로 적어도 이 상황은 '내 문제'다. 내가 들어 앉아야 하는 가장 소중한 사랑의 순간과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 일. 그러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뒤로 미뤄놓고 내가 있어야 하는 그 자리를 요구하겠다. 그러나 냈어야 할 화는 이미 오늘의 전화로 충분히 낸 듯 하다. 상대방에게 더 이상의 감정적 상처는 안겨주지 말자. 그는 똑똑한 사람이고 이미 잘 알아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너무' 노력하지 말자. 지금은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순간이지,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는 포인트가 아니다.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나를 잃는 멍청한 수는 두지 말자, 그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기 위해, 그를 잃지 않기 위해, 좋게 좋게 넘어가기 위해 스스로 이 상황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합리화하려고 들지 말자. no more excuses. 상황에 대한 실체적 진실 앞에서 도망가지 않겠다. 가장 선한 방식과 태도로 대응하겠다. 나를 위해, 이 관계를 위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너를 위해.
https://youtu.be/u-CCHDQVzr4
'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0) | 2022.10.24 |
---|---|
정리 (0) | 2022.10.21 |
막막한 날들이 다시 찾아오고 (0) | 2022.09.28 |
대화 전 다짐 (0) | 2022.09.23 |
금이 갔다. (1) | 2022.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