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2. 20:56ㆍ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1. 험하게 일을 하고 돌아와 땀과 먼지에 절어버린 옷을 벗어 던지고 몸을 씻다보면 그제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무거운 장비를 나르다 몸 여기저기 생긴 자국들, 여기저기 긁히고 베인 잔상처들, 현장에선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긴장이 풀리면 그제서야 발견되는 통증들-그 때서야 골절이 됐다거나 인대가 늘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피가 옷과 엉겨붙어 옷을 벗을 때 쩍하는 소리와 들썩이는 피딱지. 누군가는 어떻게 그렇게 큰 상처가 난걸 모를 수 있냐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리고 그 이가 어떤 말을 하는지 나 역시 너무 잘 이해하고 있지만, 급박한 현장에 있다보면 '그럴 수 있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된다'.
2. 주말 사이 남자친구와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있었다. 오빠의 전 여자친구가 등장을 했는데, 그 상황이 좀 너무 기가 막힌 구석이 있기도 했고 이미 우리 사이에 그녀와 관련해 몇 차례 갈등이 있었던 터라 나와 오빠 모두 정신을 놓고 말았다. (우린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실제로 벌어진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제 위치에서 나름대로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요청했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내 요청대로 일을 처리했다. (그의 대처가 전부 맘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오빠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 순간 나에겐 기습적으로 벌어진 상황이 우리 사이에 스며들어 균열을 내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거센 모래바람이 지나간 뒤, 나는 제자리에 풀썩 드러누워 눈만 껌뻑댔다. 오빠는 내 근처로 차마 오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채로 제 나름대로 '더럽게 재수없는 상황'에 대한 화를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듯 했다.
나에겐 그 사건이 '이 연애를 여기서 그만둬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일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애를 하기 전 내 스스로가 상대에게 요청했던 기준(1)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 2) 전 연인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청산할 것)이 힘없이 무너졌고, 심지어 오빠는 이미 같은 문제로 내게 두 번의 경고를 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삼진아웃'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 여친을 대하는 오빠의 태도는 너무 우유부단해 보여서 더욱 화가 났다. 이번 사건이 오빠가 의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애시당초 막을 수 없는 사건이었냐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가슴 깊은 곳에선 짜증과 실망감이 가득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와 나는 최대한 숨죽인 채로 울었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던 오빠가 함께 울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보다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오빠는 나한테 너무 귀하고 소중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런 태도에 휘둘리고 있는거냐'고 말하자, 오빠는 그 때 부터 꺽꺽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우는 오빠를 마치 아기 안듯 부둥켜 안고 한참을 달랬다.
다음 날 오빠와 나 모두 하루를 망쳤다. 오빠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전 날 밤 술을 두 병 먹고 오전 반차를 냈다고 했으며, 나도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어 하루를 통채로 날려먹은 상태였다. 그 날 저녁 오빠와 전화를 하는데 오빠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는 내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노력하는 걸 알지만 내가 떠나갈까봐 무서웠다며 다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는 세 시간 넘는 통화를 하며 다시 그를 달랬다.
3. 그 다음 날에는 오빠를 만나 같이 저녁을 먹었다. 다시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같은 분위기에서 한참 시덥잖은 이야기와 농담을 나누었다. 식사 끝에 디저트가 나왔는데 깜짝 이벤트가... 자칫 잘못 이해하면 섬뜩(?)하기 그지 없지만 실은 이 말은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의 변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오빠는 지난 사건을 통해 내가 본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통렬히(?) 자각을 한 모양. 그러나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 같다. 결혼하자는 오빠의 말이 하루 이틀 된 건 아니지만 이번의 것엔 시큰둥하고 한편으로는 불가능한 무엇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4. 문제는 나다. 며칠 동안 혼란했던 마음이 점점 가라앉으며 마음 깊숙한 곳이 여기저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괜찮은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가 상처투성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애써 노력을 하고는 있지만 실은 오빠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버렸다는 것, 나는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 여기서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 노력을 해도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지같은 사건이 중요한 것들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데... 하필 그와의 관계에서 이 문제가 벌어져 버렸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나아가게 될까. 점점 마음이 막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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