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21:42ㆍ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1. 어제는 오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이틀 전 술에 취해 '빨리 결혼하자'고 조르던 모습과는 달리, 어제의 오빠는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들려주었다. 그가 한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인은 나와 결혼 하고 싶으며 내가 결심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 그러나 결혼이나 육아의 여부와 시점은 전적으로 내 삶과 행복을 고려해 '민지에게 좋을 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재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내가 결심이 서면 알려달라는 것.
2. 그간 오빠가 던지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일종의 농담이나 '난 네가 최고로 좋아'의 다른 표현 정도로만 가볍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상대방은 내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태도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되물은 끝에 그의 입장을 선명하게 확인했고, 그런 뒤에는 내 입장을 가급적 명확하게 밝혔다.
1)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오빠의 행복이라는 것. 오빠 스스로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고 건강하고 자기다워질 수 있는 선택을 하길 원하며 그것이 나에게도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것. 나는 언제나 그런 오빠의 선택을 지지하고 서포트 할 것이라는 것.
2) 나에게 결혼이란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배타적인 의미에서의)이성으로, 가장 가깝고 절친한 친구로 확신한다는 것이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이변이 없다면 그 확신의 상대방은 오빠가 될 것 같다는 것. 실제로 나는 오빠를 인간적으로서/남자로서 인정하고 애정하고 존경하고 있다는 것.
3) 오빠와의 관계 안에서는 아이를 가질 계획이 있다는 것. (본래 나는 딩크였다.) 그리고 그러한 결심은 '오빠가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오빠가 우리의 아이를 원하고, 나 스스로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누구보다도 주체적인 태도로 아이를 갖고 육아를 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밖의 자질구레한 이슈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전달했다. "그래, 결혼하자. 다만 시점은 고민해보자. 커플링 맞추자. (오빠는 커플링을 맞추고 싶은데 내가 싫어할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혼할 때는 반지는 맞추지 말자."
여기까지가 어제 대화를 통해 내가 오빠에게 밝힌 나의 입장이다.
3. 이제부터는 내가 나에게 하는 일종의 다짐과 결혼 전 해내야 하는 과업들.
1) 사계절은 지켜본다. 음식을 급하게 먹지 않고 천천히 씹으며 음미하듯, 조바심을 내려놓고 천천히 관계를 경험한다. 사계절에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듯, 우리네 인생과 모든 관계에도 설레는 봄-타오르는 여름-쓸쓸한 가을-차가운 겨울이 있기 마련이니... 오빠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계절을 충분히 겪어보겠다.
2) 앞선 (1)을 하는 이유는 오빠라는 사람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나란 인간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깊게 하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저 사람이 진짜 괜찮은 사람인가, 나에게 잘 해주는가'를 밝히기 위해 사계절을 지켜본다기 보다는, 오빠와의 관계 속에서 험난한 시간들과 마주했을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상대에게 어떻게 해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결혼은 서로의 장점이 아닌, 서로의 단점이 보이고 그것을 맞출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하는 것이라는 선배의 말을 기억하자)
3) 현재 하는 일을 정리하고, 자격 시험을 합격한 이후에 결혼을 한다. (향후 거취를 확정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
- 자격 시험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1년 안에 합격을 한다.
4)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유럽여행을 반드시 다녀오자.
5) 땅고와 관련된 물건을 정리한다. (남아있는 옷을 팔아버린다는 의미)
6) 어떤 운동이든 1년 이상을 꾸준히 하자. 영양제를 챙겨 먹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자. 규칙적으로 자고 먹는다.
7) 나란 인간에 대한 존엄과 자부심을 지키며, 스스로에게 비겁하지 않기 위한 1년을 계획하고 철저하게 실행한다. (오빠가 좋은 사람이듯 나도 못지 않은 좋은 사람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
8) 이성적인 태도를 잘 유지하고 견지한다.
9) 정신분석을 잘 끝내고 - 그간의 분석에 대한 리뷰를 한다. (분석가와 약속한 작업)
10) 오빠와의 끝이 어떻게 날지는 현재로써 알 수 없다. 그러나 매듭이 어떻게 지어지게 되든, 타성에 젖지 않겠다. 그가 내게 귀한 선물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해 늘 귀하고 소중하게 대하겠다. 한결같을 것, 다정할 것, 진심으로 사랑할 것, 나와 그의 고유한 색깔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
11) 만약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보인다면(때로는 흐릿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기와 애정의 정도를 불문하고 단호하고 빠르게 손절을 하자.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 속에서 '나'와 '너'를 잃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개선되지 않을 때 관계를 끊어내겠다.
4. 여담. 나는 왜 그를 사랑할까에 대한 지금까지의 답.
그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견지하고 싶은 삶의 태도로 삶을 살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수많은 귀하고 좋은 자질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선행되는 것은 - 무엇보다 나는 그의 존재가 그 자체로 좋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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