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의 강원도

2021. 8. 3. 04:10essence, existence/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강릉과 고성에 다녀왔다. 작년에는 폭우와 풍랑주의보로 궂은 날이 계속 됐는데 올해는 더없이 맑고 쨍했다. 돌이켜보면 작년과 올해 모두 함께 간 사람들의 많은 배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무쪼록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며, 올해의 강원행을 정리해본다. (서울에서 있던 것은 추후에 별도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좋았던 것

#한길서가 #고성바다 #아무도 없는 해질녘의 바다와 커다란 달 #밤바다 #화진포 #통일전망대 #DMZ 박물관 #백도막국수 

#미시령옛길(설악산) #친구와의 밤수다 #마제소바 #현대카드뮤직라이브러리 #현대카드스토리지 #알뜰한 여행 

 

별로였던 것

#오징어난전 #젤라또

 

나중에 하고 싶은 것 등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강릉과 속초의 서점 여기저기 #테라로사 경포호수점 #양양에서 서핑 클래스 #또 다시 고성에서 막국수 


 

좋았던 것


한길서가

 

허난설헌, 허균 기념관을 찾아 걷는 길에 우연히 만난 '한길서가'. 무성한 나무 위로 빼꼼 보이는 노출 콘크리트의 건물에 적힌 書자를 보고 발걸음이 멈췄다. "에? 여기에 서점이 있었다고?" 강릉에 오기 전 이 곳의 서점들에 대해 꽤 샅샅이 조사했었는데 경포호 근처에 서점이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던 탓이다.

 

강릉 경포호수 근처 카페 테라로사와 같은 건물을 쓰고 있는 이 서점은 이름 그대로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서점이다. 이 곳에는 오직 한길사에서 출판한 책들만 전시돼 있다.

 

1층의 카페를 지나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으로 들어서면 샛노란 페인팅 바탕에 적힌 윌리엄 모리스의 이야기가 이곳을 찾은 손님들을 맞는다. "예술이 창출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집이라고 답하리라. 그 다음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

 

모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탁월한 책들을 품고 있는 기능적이며 아름답고 동시에 철학적인 공간들을 사랑한다. 그런 점에서 한길사는 책을 만들고 담는 공간에 대한 철학이 느껴지는 출판사여서 좋다. (물론 한길사에서 펴내는 책들 역시 좋아한다.) 아직 실제로 방문을 하진 못했지만, 파주의 한길사 사옥과 북하우스를 담은 사진을 보았을 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서점에 들어서면 경포호 주변로 조성된 공원과 그 주변을 흐르는 물길들이 눈에 들어온다. 밖은 불볕더위인데 서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그리 맑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고성으로 올라가기 전에 저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랐는데 운이 좋게도 그럴 수 있었다. 

 

책이 전시된 섹션들의 모습.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함석헌 선생님과 관련된 책들이 모여있는 섹션이었다. 함석헌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빠르게 잊혀지는 시대에서 그 분의 글을 모아놓은 공간이 강릉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 뭉클해지는 일이었다. 왠지 김조년 교수님이 쓰신 글도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역시나. 사진을 찍어 교수님께 보내드리니 곧 답장이 왔다. "어느 곳인데 이렇게 귀한 책들을 진열해두었는고? 거미줄처럼 얽힌 인연들이여."  

 

서점을 관리하시는 직원께 책 추천을 부탁드렸더니 그 분께서 정말 열과 성을 다해 책 고르는 일을 도와주셨다. 사고 싶었던 책이 많았지만 가방 안에 공간이 없어 할 수 없이 딱 한 권만 골랐다. 한나 아렌트가 지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올 겨울 제주에서는 수전 손택과 함께 했으니 이번 여름 강릉에서는 한나 아렌트와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멋진 여름이 있을 수 있나! 더불어 한길사와 테라로사가 함께 만든 노트(song of books)도 한 권 샀다. 특히 올해 들어 부쩍 좋아진 당근색으로! (하지만 12,000원을 주고 살 만큼 품질이 좋지는 않다. 특히 주로 잉크펜(라미 만년필과 펜텔 트라디오 수성펜)을 사용하는 나에게는 난감한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종이가 두껍지 않아 뒷장에 글씨가 고스란히 비친다는 점.)

 

책을 들고 의자에 앉으니 직원께서 다가와 "아가씨는 혼자 왔으니까 주는 거에요" 하고 건네주신 따듯한 티 한 잔. 강릉에 도착해 혼자 보낸 잠깐의 짬이 생각보다 너무 행복했다.   

 

 


고성의 숙소 앞 바다

 

일정을 마치고 캔맥주와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숙소 앞 바닷가로 나갔다. H는 물놀이하러 바다에 들어가고 나는 해변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 초저녁의 동해 바닷가를 오랫동안 보았다. 해가 떨어짐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풍경은 어쩜 그렇게 다채로운지. 거기에다가 밤에는 아주 밝고 커다란 달이 떴다. 햇살이 부서지며 생기는 윤슬만큼이나 달빛이 그리는 윤슬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란히 앉아 오랫동안 바다와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H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언제나 '맥주'였다. 애초에 경쟁상대로 놓을 후보가 없을 만큼 그 친구의 맥주 사랑은 좀 남다른데가 있다. 그런 H가 이번 여행 끝에 술을 줄이겠다는 굉장한 다짐을 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대상은 술이었지만 실은 삶의 태도에 대한 다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어려운 결단을 해내는 친구의 모습은 해질녘의 바닷가만큼이나 참 멋졌다.

 

서로가 찍어준 서로의 뒷모습. 개인적으로 친구가 바닷가에 고요히 떠 있는 사진들이 훨씬 좋다. H는 알까, 내가 얼마나 본인을 예쁘다고 생각하는지를! 

 

 


통일전망대와 DMZ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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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전쟁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져본 적이 없다. 수전 손택이나 존 버거의 글을 읽으면서 '전쟁'은 내게 너무 피상적인 사건처럼 이해되곤 했었고, 최근에 라이프와 퓰리처상 사진전에서도 전쟁에 대한 섹션들은 빠르게 보고 넘어갔다. 하지만 내가 만약 강원도나 연평도와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통일전망대와 DMZ 박물관을 관람하며 전쟁과 분단이 누군가에게는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평화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잊고 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시대적 과제들에 대해서도.

 

분단과 전쟁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은 너무도 가슴 먹먹했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상상해보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두려워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대성동과 마현리였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은 삐라를 살면서 처음 보았다는 것. 삐라의 내용은 너무 유치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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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우리동네] 휴전선까지 천릿길…태풍에 떠밀려 이주한 수재민촌 | 연합뉴스

(철원=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 "물이 고마 들이치는데 저 짝에 초가집이 한참 떠내리가다 팍 쓰러지데. 지붕에 사람이 살려달라꼬 고함을 치는데...

www.yna.co.kr

 


화진포 

 

작년 늦봄, 언니와 함께 블루로드를 타고 고성에 도착했을 때 차박을 위한 목적지였던 화진포. 그 때는 풍랑주의보가 뜰 정도로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타프를 치려다가 단 3초만에 철수를 결정(...)했을 만큼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맑아도 이리 맑을 수가 없었다. 태양을 가려줄 구름 한 점이 없어 온 몸으로 햇살을 받았다. 왜 이곳에 별장이 들어섰는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백도막국수 

 

백도 막국수에서 시킨 물막국수와 비빔막국수. 시장이 반찬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살면서 먹은 막국수 중에 no.1으로 꼽아도 손색 없을 만큼 맛있었다. 언젠가 현진과 봉평에서 먹었던 막국수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기대했으나 실망한 것


속초 오징어난전

 

 

가장 기대했던 속초의 오징어난전은 꽝이었다. 대전에서 2만 3천원을 주고 오징어통찜(한 마리)을 먹을 때마다 '다음에 산지에 가면 원 없이 오징어를 먹고 오리라'고 다짐했는데, 막상 속초에 가서는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대전에 비해 오징어는 비쌌고 크기가 너무 작았으며 음식은 성의가 없었고 비위생적이었고 무엇보다 매우 불친절했다.

 

인터넷 블로그에서 평일에는 보통 만원에 두 마리, 이 만원에 다섯마리를 판다고 보았는데(물론 시세에 따라 오징어 가격이 차이가 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리가 간 날은 오징어가 없다는 이유로 오징어가 마리 당 1만원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너무 작은 오징어를 섞어 팔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오징어가 통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거기에 가게 주인은 일하는 손님들 앞에서 직원에게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고 생트집을 잡으며 화를 내고 면박을 주었다. 심지어 직원이 고객 응대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초장, 간장, 종이컵 등이 없어 손님이 직접 찾으러 다녀도 주인은 오로지 직원을 갈구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걸로도 분이 가시질 않았는지 씩씩대며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런 분위기에서 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가게 주인이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직원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고. 

 

음식이 나왔을 때 처음에 보여준 오징어와 달리 이건 너무 작은 것 아니냐고 항의 하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일 분이라도 빨리 가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냥 후루룩 먹고 나왔다. 오징어가 목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초당젤라또

 

블로그 마다 칭찬 일색 도배된 순두부맛 대신 쑥과 옥수수 맛을 시킨 것이 패착이었을까? 내 입맛에 쑥은 텁텁하고 옥수수는 달았다. 

다음에 그 근처에 간다면 젤라또에 대한 욕심은 절대 내지 않으리. 대신 근처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