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 식당의 여자들 / 황희연 / 예담

2019. 10. 10. 14:59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카모메 식당의 여자들>

황희연

예담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이 책을 서른을 목전에 앞둔 지금 다시 읽었다. 이 책을 다시 읽는 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는데 이 책을 읽어내리는 마음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놀랍다. 내가 다시 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에는 30대를 건너가고 있는 열 한명의 언니들(저자를 포함해서)이 나온다. 각자가 살아온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여자라는 것, 자기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 때 행복한지 끊임없이 고민했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관성처럼 살아내던 삶의 선로를 틀었다는 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성을 포기하지만 덜 혹사 당하고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조금 더 만끽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

 

그런 언니들의 고민과 선택을 엿보는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다시 큰 위안이 되었다. 전 재산 1,000만원을 털어 여행을 떠나거나, 지금 가진 돈을 아껴쓰면 3년은 버틸 수 있을거라고 이야기하는 언니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런 것들이 무모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그렇지. 그렇다고 죽지 않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면서 편안해 졌다. 심지어 나는 그들보다 잃어야 할 것이 더 적지 않은가. 지금의 상태가 불안하지만, 존재 자체가 휘청거릴 정도로까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어쩌면 요즘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온 몸에 힘을 주고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힘을 풀고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지더라"하고 나지막히 들려주는 언니들의 잔잔하고 담백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책갈피

 

"그래, 지금이 바로 기회야. 다시 삶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분이 낮으면 눈치 봐야 할 사람이 많고, 자연히 자신의 의지대로 무너가를 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아마도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을 확률이 높다. 결혼을 원치 않아도 결혼하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하고, 터프하게 살고 싶어도 적당히 여성스러운 몸짓을 꾸미도록 강요받고, 야망을 갖고 싶어도 조신한 척 욕망을 되도록 절제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억눌리고 길들여진 모습으로 살아가다보면, 문득 이 모든 굴레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반항심이 들기 마련이다. 내가 진짜 원하는 나를 찾고 싶은 욕구다. - 13p

 

여행자들은 서로 과거를 잘 묻지 않는다. 현재를 즐기기 위해 떠나왔기 때문에 과거의 혹을 억지로 매달고 연결고리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살짝 부담감을 느낀다. 직업도, 나이도 묻지 않는 대신, 여행자들이 잊지 않고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어떤  루트로 여행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평범한 그 질문은 여행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열쇠다. 루트를 알면,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무게와 여행에 대해 걸고 있는 기대 같은 것들이 모두 짐작된다. - 14 p 

 

"여전히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들이 바뀐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바뀐 것 같아요. 교감이란 바로 이런 건가, 싶어요. (후략)" …(중략)… 사람에 대해 궁금증도 많아졌고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 하다 보니 그들의 마음도 무심결에 활짝 열렸다. …(중략)…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음식도 되도록 진짜를 주고 싶고, 마음도 되도록 진짜를 주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마음의 빗장을 열고 욕망의 무게를 슬쩍 내려놓았더니 모든게 술술 잘만 풀려나가더라는 것이다. - 46 p

 

 그녀 말대로 '무엇이 되고 싶다' 혹은  '반드시 무엇이 되겠다'는 욕심과 야망만 잠재우면, 오히려 목구멍에 밥을 밀어넣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 52p

 

"봄에는 밤 벚꽃이 필 때 술 한 잔, 여름에는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생각나는 술 한 잔, 가을에는 휘영청 달이 떴을 때 먹는 술 한 잔, 겨울에는 소복소복 내리는 눈을 보면서 마시는 그 술 한 잔. 자네가 언젠가 술 먹는 날이 오거들랑 우리 한번 즐겨보세." -55 p

 

운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바로 실력이다. 어떤 자리에 있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채는 재주, 그리고 일 자체를 충분히 즐길 줄 아는 재주, 자신뿐 아니라 남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재주, 그녀의 재능은 알고 보니 '행복을 찾아내는 것'을 누구보다 잘한다는 것이었다. - 58 p

 

그건 만들어진 자유와는 급이 다른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였다. 진정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자유를 자랑하거나 전시하지 않고, 편안하게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 64 p

 

한국 사람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애초에 배우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남자는 꾸밈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직설적이었다. 너와 함께 있고 싶으면 있고 싶다고 당당히 말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이상하면 이상한 대로 시원하게 털어놓고 진심으로 다가갔다. 여자는 뭐든지 돌려 말하는 버릇이 있었따. 같이 있고 싶어도 같이 있자고 말하는게 아니라, 또 나가는 거야, 하고 물었따. 진심을 파악하지 못한 남자는 '응, 나가는 거야'라고 말하고 진짜 나가버렸다.  - 75 p

 

"불필요한 단어를 생략하세요." 부사를 지우고, 형용사를 지우고, 접속사를 생략하라고. (중략)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로 덮여 있었습니다." 부사의 쓰임새를 연구하면서 글을 읽다보면 자연히 호흡이 가빠지고, 본래 따라가야 할 이야기는 선명함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일종의 '지옥'이다.  - 111 p

 

"첫 술에 달고 맛있는 사람이 아니라 두고두고 곱씹어야 맛이 우러나는 사람."  - 133 p

 

"아프리카 여행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데 너무나도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거든요.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생각하고 사는게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늙어서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누군가와 다정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죠." - 156 p

 

산다는건 어쩌면 이렇게 아무 질문도 필요 없고, 어떤 희망이나 절망도 필요 없는 담백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단순한 진리에 공감했다. - 170 p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서로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찾아낸다는 거지." <신세계 에반게리온> 中 - 205 p

 

"원하는 것과 적성이 일치하지 않으면 인생이 참 힘들어져요." - 229 p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끼리 묶어줘야 편안함을 느껴요. 여행객이 서로를 싫어하면 저한테 모든 화살이 돌아오거든요. 그러니까 분류에 먼저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그전까진 명상과 치유의 삶에 관심을 두며 살았는데, 점점 인간을 담고 있는 사회로 시야가 넓어졌어요. 인간이 참 별것 아닌 동물이라는 것, 예측이 모두 가능한 동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걸 알고 난 후부터 제가 편해지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세팅을 하게 되더라고요. ... 말투와 말하는 순서에 대해서도 많은 실험을 해봤죠. 제가 대략 1천 명 이상의 손님을 만났는데 그 모든 시간이 인간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떤 것 같아요." - 242p

 

"버리고 싶다고 말하는건, 사실 버린다는 시대적 트렌드를 소비하는 거예요.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버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거든요." - 250 p

 

내가 만난 여자들은 결코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갈등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그 치열한 과정, 나를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완성형이 아니고, 어떤 결과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능동태이자 부지런히 접점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순간들의 모음이다. 

 

자고로 인생의 절정은 최대한 늦게 맞이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 일찍 인생의 절정을 맞이한 사람은, 이후에 찾아노는 등고선의 저점에서 크게 흔들릴 확률이 높다. 그래서 절정의 속도를 잠시 늦추는 것, 자신이 굴리고 있는 삶의 바퀴를 일부러 멈추고 브레이크를 걸어보는 전략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대단한 용기이지만, 인생 최고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 한꺼번에 뭔가를 이룬 사람은 잃는 일만 남지만, 아직 무너가를 이루지 못하는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에 여전히 행복하다. 그 성취가 남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성공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정체를 대체로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잇는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더 화사하게 웃을 수 있는지, 자신의 못난 부분은 무엇이며 기특한 부분은 무엇인지. 자신의 비밀을 많이 캐낸 사람만이 행복의 비법을 알 수 있따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흥미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따. 카모메 식당에서 만난 여자들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참 일목요연하게 잘했다. 자기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항상 흔들림 없이 멋지게 뻗어나갔다. - 25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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