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2021. 10. 3. 19:0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넌 너무 이기적고 나 아니면 널 받아줄 사람 없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옷장 안으로 기어 들어가 식음전폐하고 며칠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몇 주 뒤에 그는 헤어지겠다고 문자로 통보하였다. 용규 결혼식이 끝나고 나오던 길이었다. 차 뒷자석에 타고 있던 친구들에게 자조하며 그 소식을 전하자 갑자기 숙연해졌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말을 외면하기 위해 두껍게 쌓았던 환상의 장막들을 걷어내고 있다. 직접 나의 입으로 또박또박 말해 본다. (너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 있어?) 나 아니면 널 받아줄 사람 없는데 어쩌겠어. 마치 가슴 속 한 복판에 드라이 아이스를 던져 놓은 것처럼, 시리고 차가운 기운에 몸도 마음도 꽝꽝 얼어 붙는다.

내가 이 때의 이야기를 꺼내자 분석가가 물었다. 장난으로요? 진심으로요?

몇 년 동안 사람들이 내게 연애나 결혼 할 생각이 없는지 물었을 때,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 진짜 못됐어요. 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없어요. 저 좋자고 누구 인생 망칠 일 있어요? '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인식조차 하지 않는 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이야기 했다.

엄마와 아빠도 나를 키우며 그런 말을 많이 했다. 네가 내 딸이지만 넌 정말 지독하다. 딸이 아니었으면 너란 인간은 쳐다 보지도 상종하지도 않았을거다.

그 친구의 말도 부모님의 말도 다시 그 말을 꺼내 발음하고 잘근잘근 깨물어보고 입 안 여기저기로 굴려본다. 넌 이기적이고 나 아니면 널 받아줄 사람 없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간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말과 마음과 사람들을 보내고자 한다. 어떻게든 포장하려고 덕지덕지 둘러놓았던 포장지를 걷어내고, 나와 그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다시 바라보고, 미처 하지 못했던 뒷 작업들을 스스로 해내고, 잘 떠나 보내는 것이다.

어제 오늘 그 첫 삽을 떴으니 누군가를 탓하지 말고, 용기내서 작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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