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10. 06:07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어제 꿈을 길고 다이내믹하게 꿨는데 딱 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짧은 토막글은 그 한 장면에 대한 것이다. 

 

꿈에서 송과 재회했다. 송이 먼저 연락을 했는지 우연한 계기로 우리가 마주치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송은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 서운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했다. 그 친구가 내게 '한 번쯤은 연락을 할 줄 알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안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긴 대화를 했다. 서로가 그간 갖고 있던 오해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고 나니 '우리 다시 잘해보자'같은 명시적인 말이 없었음에도 그냥 자연스럽게 관계가 회복 됐다. 송과의 관계는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두 사람 모두 조심스러웠지만 제 자리를 찾아간 것 마냥 편안함을 느끼는게 분명했다. 송과 침대에 아무렇게 누워 있는데 그 친구가 내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식의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먼저 꺼내려던 말을 송이 먼저 꺼낸 것처럼 느껴져 잽싸게 대답했다. '내가 그 말 먼저 하고 싶었는데! 난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너를 사랑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랑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 난 정말로 너의 모든 것에 고마워.'

 

꿈에서 깬 뒤, 가벼운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을 느낀 이유는...

첫째,  이미 오래 전 헤어진 전 연인을 꿈에 등장시켰다는 것

(상대방은 내 꿈에 자기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둘째, 꿈 속에서라도 그와의 재회를 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이것도 상대방 입장에선 끔찍할 수 있다.)

셋째, 몇 번의 꿈분석을 통해 내 꿈에서 송이 중요한 상징으로 치환되서 나오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에

(왜 나에게는 여전히 송이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내 모습이 너무 견딜 수 없다.)

넷째, 혹여 이것이 욕구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형태는 아닐까 해서  

 

그래서 나는 이 꿈을 어떤 방식으로도 기억하지 않기 위해 

첫째, 꿈을 기억해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둘째, 기억이 나는 이 장면도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애써 노력하고

셋째, 잘 되지 않자 '이 꿈은 개꿈'이라며 무시했다.

하지만 모두 맘처럼 되진 않았다.

 

이 꿈에 대해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꿈분석을 하면) 진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송은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상징 중에 하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송이 나오는 꿈은 진짜 열심히 분석할 실익이 있다.

그러나 머리론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으론 송이 등장하는 꿈만큼은 정말로 분석하고 싶지 않다. 

왜 분석하려고 들지 않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 꿈을 '살다가 우연히 찾아오는 요행'같은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내 맘 편한대로 생각하련다.  

하지만 언젠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분석가에게 이 꿈을 이야기하는 날이 올 것이다.

 

아차, 이건 여담인데 만약 현실에서 송과 만나게 된다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이것이다.

'너란 사람은 내게 너무 끔찍해. 내 인상의 최악이 너야. 그러니 제발 네 삶에서 깨끗하게 나를 표백해줘.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잊어줘. 두 번 다시는 너와 얽히고 싶지 않아.'

이것이 내가 상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 그를 애써 잊으려고 노력하고, 그를 잘 떠나보내는 모든 방법을 궁리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짐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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