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랭 가리 <자기 앞의 생>

2016. 7. 14. 18:0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이 글은 근 일주일 동안 통근버스에서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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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로자와 그리고 어린 모모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건물의 7층에 늙은 자 아줌마가 살고 있다. 로자는 젊은 시절 창부였고 나이가 들어 사창가를 떠난 이후에는 창부들의 자식을 맡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로자가 보살피는 아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모모는 세살 때 로자에게 맡겨진 아랍인 아이다. 다른 아이들의 부모는 주말마다 자신의 아이를 보러 오지만 모모는 커오면서 부모님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엄마에게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 모모는 방 이곳저곳에 똥을 싸기도 하고 가게 주인이 보는 앞에서 물건을 훔치곤 한다. 모모는 그렇게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사랑과 엄마가 필요한 아이다.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 부모의 부재와 결핍감

  부모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결핍감은 모모의 성격이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모모는 세 살 무렵 로자 아줌마에게 맡겨진 이후로 자신의 엄마와 아빠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가 어떤 사람일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다. 이런 결핍감 때문에 모모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친절이나 미소 앞에서 무방비상태가 되곤 한다. 예컨대 모모가 식료품점 주인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달걀을 훔쳤던 사건을 생각해보자. 뺨을 때릴 줄 알았던 주인이 혼내긴 커녕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귀엽다고 말하고 심지어 달걀까지 하나 더 손에 쥐어주자 모모는 오전 내내 그 가게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모모는 "한순간 나는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중략)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의사선생님 카츠와의 관계 역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필요한 이 꼬마는 자신을 소중한 존재인마냥 진찰해주고 관심 어린 말을 건네고 미소를 지어주는 카츠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며 아픈 곳이 없을 때도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곤 한다. 


  반대로 결핍감을 건드는 사건 앞에서 모모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 폭발을 보여준다. 예컨대 로자의 집에 놀러온 손님이 모모에게 자신이 곧 아들에게 비싼 선물을 할 예정이라며 깐족대자 모모가 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어떤 끔찍한 폭력적인 감정에 사료잡혔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로 차인다는가 하는 밖으로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길이 없다." 모모가 느꼈던 감정은 결핍감에서 비롯된 절망감, 분노, 원망스러움이 결집된 무엇이었을 것이다. (여담. 부모의 얼굴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모모 앞에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으스대는 손님은 얼마나 어리고 유치한가. 참고로 모모는 이 손님을 위선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대체물: 개와 우산

  부모와 나눠야할 친밀감과 사랑, 그러나 그것을 충족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슬픔과 분노. 어린 모모는 자기 안에 있는거대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다양한 대상물을 통해 쏟아붓게 된다. 

  

  그 첫번째 대상물은 푸들이었다. 어느 날 모모는 동물가게에서 예쁜 푸들 한 마리를 훔치고 '쉬페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사랑한다. 그 때를 회상하며 모모가 고백한다. "나는 나의 내부에 넘칠 듯 쌓여가고 있던 그 무언가를 쉬페르에게 쏟아부었다.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강아지가 보다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랐던 모모는 이름 모르는 귀부인에게 쉬페르를 팔고, 그 대가로 받은 500프랑은 하수구에 버린다. 


  두번째 대상물은 우산이었다. 꼬마 모모는 우산에 녹색 얼굴을 만들고, 옷을 입힌 후 아르튀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우산을 들고 시내로 나가 어릿광대짓을 했다. 모모는 아르튀르를 두고 "특별히 사랑할 만한 대상을 갖고 싶어서였다기 보다는 어릿광대짓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으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경찰를 피해 도망치던 중 우산을 떨어트렸을 때 모모는 주저 없이 우산을 주웠고, 잠잘 때도 우산을 꼭 끌어안고 잤으며, 수중의 돈을 털어 우산을 치장하고, 심지어는 나중에 로자 아줌마가 죽는 순간에도 우산을 챙긴다. 부모에게 한껏 사랑받고 귀여움 받을 나이의 아이가 강아지와 우산에 투영한 감정은 무척 가슴 시리고 짠하다.



모모의 세 엄마: 아이샤, 로자, 나딘

  그러나 푸들과 우산 아르튀르는 부모, 특히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모의 삶에서 엄마의 역할을 한 사람이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모모를 낳아준 엄마 아이샤가 있다. 언젠가 모모의 아버지가 모모를 데리고 가겠다며 로자의 집에 방문했을 때, 모모는 자신의 엄마가 잘나가는 창부였다는 사실과 이름이 아이샤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녀가 비루하게 생긴 포주의 아이를 임신했고 그 아이가 자신이며, 질투에 눈이 먼 남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가 죽기는 했으나 어쨌든 자신에게도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어렴풋한 이야기를 듣고 모모는 엄마라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게 된다.


  두번째는 나딘이 있다. 나딘은 모모가 어릿광대가 나오는 극장에서 만난 젊은 성우인데 모모가 이상화된 어머니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대상이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모모가 나딘이 일하는 곳에서 영화를 되감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그 때 모모는 생애 처음으로 엄마에 대해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 상상의 결과물은 나딘이었는데 그런 모모의 상상은 곧 깨져버리게 된다. 왜냐면 나딘에게는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프랑스 국적인 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들을 보며 모모가 가난하고 사회의 비주류인 자신의 신분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모를 길러준 로자가 있다. 아이샤가 생물학적인 엄마고, 나딘이 이상화된 엄마라면, 로자는 모모의 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엄마다. 로자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태인인데 그녀 역시 모모처럼 가족이라 부를 사람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생을 살아왔다. 이렇게 생 앞에 홀로 던져진 두 사람은 때로는 부모와 자식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동지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로자의 끝을 지키는 모모 

  하지만 로자는 늙고 병들어 수시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의사선생님은 모모에게 로자를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모는 로자를 병원으로 보내는 대신 그녀를 건물 지하실에 숨기기에 이른다. 그것은 죽음보다 병원을 더 두려워하는 로자를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로자 없이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은 모모 본인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결국 지하실에서 로자가 죽게 되자 모모는 삼 주 동안 그녀 옆을 지킨다. 특히 창백해진 로자의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주고 시체 썩는 냄새가 역해지자 로자 몸에 향수를 부어주는 모모의 행동은 참으로 가슴 시리다.


  로자의 죽음은 모모에게 상징적인 사건이다. 모모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사건이 모모에게 있어서 성인이 되는 중요한 통과의례라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모모는 통과의례를 무사히 이겨냈을까, 아니면 그 자리에서 멈춰서버렸을까. 



사랑이 필요한 아이의 물음.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책의 시작과 끝에서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그렇단다." 모모는 울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게 믿는다. 


  혹자는 모모가 조숙한 척 하지만 어린아이같고 과대망상을 한며 비뚤어져도 뭔가 단단히 비뚤어진 것 같다며 불편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이런 시선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모모는 겨우 14살이다. 그 아이의 행동에 유치하고 어린 아이다운 면모가 있는건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 맘 때 아이들에게는 그런 '조숙한 척'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나 역시 그 나이에 그랬다.), 비뚤어지게 생각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나는 모모가 보여주는 따듯함과 어른스러움에 놀랄 지경이다. 모모는 겨우 여섯살 밖에 되지 않았을 때도 로자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냉정하다고들 했지만 세상에 그녀를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육십오년 동안 온갖 풍상을 견디어 왔으니 때로는 그녀를 용서해줘야한다."라고 말하는 아이었으니까 말이다. 



사랑이 필요하다.

  만약 모모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모모에게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말하는건 단순히 심장이 펌프질하는 상태를 의미하는건 아니라고,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그런 생물학적 의미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사랑, 즉 타인과 정서적·심리적으로 친밀감을 나누는 행위가 없다면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살아있고 돈이 많다고 해도 그게 대관절 무슨 소용일까. 아직까지 나는 사랑이 빠진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

  

  모모가 로자의 죽음 이후 어떻게 컸을지는 모르겠다. 카츠인지 하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누군가의 말처럼 모모는 멋진 시인 혹은 대단한 반항아 중에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어렴풋하게 짐작해본다. 그리고 기왕이면 멋진 시인이 됐기를 바란다. 사랑을 믿고 싶었던 소년의 결핍이 잘 아물어 향기가 났으리라고,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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