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12. 16:44ㆍ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15년차 친구 흥빈.
흥빈이 한 살 오빠지만 맞먹고 가족처럼 지낸 세월이 10년이 넘었다.
아버지 장례식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주기 싫다는 이유로 흥빈은 딱 세 사람에게 연락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나였다.
나 역시 연락을 받자마자 하던 일을 모두 놓고 달려갔었을만큼, 서로에게 가족만큼 가까운 사람.
그 양반이 참 오랜만에 밥을 먹자고 연락을 해와서 눈치를 챘었다.
이별을 했구나.
없는 시간을 억지로 만들었다. 시간을 만들자마자 흥빈은 바로 나 사는 동네로 쪼르르 넘어왔다.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역시나.
헤어진 여자친구가 자신에게 분노를 쏟아냈는데 미안함이 너무 크다며,
짝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마음이 내려놔지지 않는다며 그간의 일들을 풀어낸다.
나는 그저 친구에게 듣는 귀만 빌려주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생각들을 전해줘도 되는 것일까.
자신을 탓하는 친구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사랑이란, 관계란, 선택과 결단이란, 어른됨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
나는 흥빈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금연 3년차인 흥빈은 '마치 담배를 끊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며,
나 역시도 과거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 애써 노력하며 사는 것이지
30년 넘게 안고 온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담배를 끊었지만 언제고 담배를 다시 필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처럼.
그래, 어쩌면 흥빈 말처럼 나 역시 흥빈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미워했던 대상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나 역시 너와 다르지 않지,
익숙한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성의 끈을 더욱 바짝 부여잡고 있을지도 몰라.
우리 최소한 자기에게 비겁해지지 말자. 그리고 남을 바꿀 생각도, 의존할 생각도 하지 말자.
무엇보다도 이성의 끈을 놓치고 스스로와 타협하면 안된다.
-
흥빈에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할까 했지만 삼켰다.
그건 내가 나에게 해야 하는 말.
삶의 끝까지, 내 삶에 남겨져 있는 것들을 잘 들여다보고-비겁해지지 말자- 윤리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자.
지나가버린 세월들을 마저 잘 떠나보내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벌써 일 년 중 한 달 반이 지나갔다.
내 계획과 의지대로 삶을 세우기 위해, 시간이고 에너지고 잘 쏟아붓고 의미있는 소기의 성취를 해내야한다.
몸도 마음도 일도 생활도. 물러서지 말고 비겁해지지도 말고 나태해지지도 말자. 성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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