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가족, 책임에 관하여

2021. 12. 16. 06:11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1. 해묵은 싸움

아빠는 술 자리 도중 첫째 형수의 부고를 듣고 부리나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던 우리는 큰 엄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엄마가 전화를 끊자 동생이 짧게 말했다. "난 안가". 하지만 동생이 말하지 않았어도 이미 엄마는 우리 남매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남매가 아빠의 가족들과 왕래를 끊어버린 것이 벌써 15년이 넘었고 그 사이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어떤 가족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우리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지가 잘나서 큰 줄 알지. 싸가지 없는 자식들. 최소한의 가족 된 도리는 해야할거 아니야." 성난 아빠를 달래기 위해 엄마가 출동했지만 아빠의 언성은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동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실랑이로 시작된 상황은 몸싸움으로 번졌다. 아빠가 동생이 때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 역시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상황은 참으로 촌극이 따로 없었다. 아빠가 빨래통을 잡고 휘두르는 바람에 알록달록한 빨래감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자비에 둘란의 <로렌스 애니웨이> 한 장면 같았다. 물론 영화의 그것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만.) 동생과 엄마는 아빠가 휘두른 빨래통을 밀쳐냈다. 빨래통은 공중에서 부-웅 떴고 정확히 엄마의 머리 위로 골-인. 졸지에 당신 몸통의 1/3 높이의 빨래통을 뒤집어 쓴 엄마는 앞이 보이지 않아 양 팔을 좌우로 뻗고 허우적거렸다. 허우적대는 엄마를 어정쩡하게 사이에 둔 채 동생과 아빠가 몸싸움을 계속 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으니 아무리 동생을 때리려고 해도 유효타가 나올리 만무했다. 오히려 아들이 자신을 가볍게 밀쳐 낼 때 마다 어떻게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엉거주춤 대기 바빴다. 실로 우습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 코미디 같은 순간도 잠시, 동생을 때리려던 아빠가 그만 엄마를 때렸고, 엄마의 짧은 외마디 비명 소리에 나는 이성을 잃고 아빠에게 달려 들었다. 3:1의 싸움, 그것도 다 큰 성인 자녀 두 명이 합세한 3인과 술에 취한 아빠가 1인 간의 싸움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어떻게든 식구들의 기세를 제압하려고 소리를 빼액 빼액 질러댔다.

 

엄마는 우리를 방 밖으로 내보냈고 나와 동생은 부엌으로 돌아와 다 식어버린 밥상 앞에 다시 앉았다. 애써 침착하려고 했지만 분노가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하지만 평생 동안 아빠와 똑같은 갈등을 지겹게 되풀이 해온 우리는 이것쯤이야 익숙한 일인라는듯, 아무렇지 않게 수저를 들고 차갑게 식은 밥을 입 안으로 꾹꾹 밀어 넣었다. 무심하고 덤덤하게. 하지만 입 안에 들어온 차가운 밥 한덩어리를 씹는데 눈물이 터졌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숨 죽이고 울던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가 부엌에 들어갔을 땐 동생 역시 숨 죽인 채 울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기억이 난 것. 어릴 적  부모님이 싸우면 나는 동생과 부엌에서 차갑게 식은 보리차에 밥을 말아 무말랭이와 먹곤 했었다. 그 차가운 밥의 식감이 며칠 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부턴가 나는 찬밥을 먹지 않는 다는 것을,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은 더욱 더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가족은 무엇인가

집 안 분위기는 냉랭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고 대화는 사라졌다. 그렇게 장례식은 여느 때처럼 엄마와 아빠, 두 분만 참석하는 듯 했다. 하지만 장례식 둘째 날 아침, 아빠는 기어이 내게 서울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말을 뱉어냈다. 서울행 기차를 타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던 나는 신발장에서 아빠를 잔뜩 노려본 뒤 '싫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아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왔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빠는 "넌 최씨 집안 사람이다"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히게 했다. 그리고 온갖 가족 행사에 엄마와 우리 남매를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아빠의 원가족은 우리 남매에게 늘 정반대의 말을 했다. 그들은 내게 "너는 여자니까 우리 집안 사람 아니다.",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닌 애가 왜 제사 지내는 데 들어오냐." 나는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들과 분리돼 상을 받았는데, 아주 작은 상에 집안의 모든 여자들이 빽빽하게 앉아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식사를 하곤 했다. 더운 밥과 좋은 반찬은 모두 남자 상으로 갔다.

집안의 막내 며느리인 엄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 받이가 되었다.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우리 남매에게 와서 엄마를 신랄하게 욕했다. "우리 막내 서방님 너무 불쌍하다. 너희 엄마같은 사람 밑에서 태어난 너희도 너무 불쌍하다. 아빠한테 엄마랑 이혼하라고 해라." 그들에게 우리는 다 같은 조카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다른 조카들에게는 용돈을 쥐어 줬지만 우리에게는 단 한 푼의 용돈도 주지 않거나, 맛있는 음식을 우리 몰래 숨겨두곤 다른 조카들에게만 주는 일은 예사였다.

결국 우리 남매가 선택한 방식은 차 뒷좌석에서 해가 떨어질 때 까지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었다. 여섯, 일곱살 짜리 어린 딸과 아들이 추운 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는 차 뒷좌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아빠는 중간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그저 우리 손에 차 키를 쥐어 줄 뿐이었다. 그 어떤 식구들도 막내 동생에게 어서 가서 네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빠의 원가족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은 어린 시절 우리 남매가 경험한 가장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며 구태의연한 사람들이고 공간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은 그저 버텨야 할 대상이었지 단 한번도 가족이었던 적이 없었다. 애시당초에 그들 역시 내게 "넌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라"고 못 박지 않았던가? 그게 겨우 여섯, 일곱살 짜리 어린 조카에게 할 말이 맞는가? 자기가 더운 밥을 더 먹으려고 찬 밥을 어린 조카 앞에 밀어놓고 호통을 치는 것이, 조카들 앞에서 정당하지 않은 이유와 방식으로 엄마를 욕하고 울리는 것이, 다른 조카들에게는 커다란 선물과 용돈을 주는 장면을 지켜보는 우리에게 '욕심쟁이'이라고 힐난 하는 것이 가족이 할 짓인가? 

무엇보다도,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보호 하지 않은 내 아버지는 '자신의 원가족을 무시하는' '싸가지 없는 자식'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긴 한건가? 그가 우리 남매를 낳은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싸가지 없는' 우리를 비난 할 수 있는 것인가? 친가의 행사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자식들을 방에 가둔 채 온 종일 패는 것이 정당해지나? 아버지로서 해야 하는 의무를 전혀 다 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끝끝내 없는 것인가? 자신의 행동으로 삶의 깊은 상처를 받은 아들과 딸에게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과 없이 자신이 느끼는 억울함과 정당성만 반복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연 '가족'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이 가족이어야 한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가족을 버리겠다. 사랑과 책임에 기반하지 않은 채 '피에 대한 환상'에만 기대어 약한 이들에게 상처내고 착취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가족이라면 나는 백번도 가족이 없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3. 책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아버지란 무엇인가. 

언젠가 분석가가 들려주었던 말처럼, 나 역시 책임이라는 것은 '나는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했어야 하지만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고 우리를 굶기지 않았으며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으나, 안전한 가정의 울타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가정폭력의 가해자였으며 자신의 원가족으로부터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지키지도 않았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과연 아버지란 무엇인가, 책임이란 무엇인가'. '과연 나에게 아버지가 있긴 했던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있었음에도 나는 한 평생 '아버지'의 빈 자리를 그리워하며 밖으로 나돌았다. 어린 시절에는 선생님을, 20대에는 남자친구와 삶의 멘토가 될만한 '어른'을 희구함으로써 그 빈자리 채우려고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자리는 다른 어떤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며 그저 내가 한 평생 나의 일부처럼 껴안고 가야 하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고 가볍다. 그리고 아버지와 딸이라는 특수관계에 있는 초라한 남자가 보인다. 나 역시도 그 남자에게 얼마나 수많은 욕망들을 뒤집어 씌워왔는지가, 아버지라는 환상을 걷어낸 나 역시 얼마나 작고 볼폼 없는지가 보인다. 그렇게 마음 속으로 그리워 하던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연애나 결혼 전에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닮은 이들을 찾아 헤매지도 않을 것이고, 이번에 아버지에게서 독립하면 두 번 다시 과거의 결착 상태로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멀쩡이 살아 계시는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 마음이 후련하냐고?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