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분석을 돌이켜보며

2021. 12. 20. 22:57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집과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가가 글썽글썽해지는 친구들을 아주 오랫동안 부러워했다. 

친구들과 달리 나에게 집과 부모란 그저 견디고 버텨야 하는 지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술에 잔뜩 취한 채 울다 잠이 들었거나 혹은 울며불며 소리를 지르며 집 안 집기들을 던지고 부수고 아버지와 가족들의 사진을 찢어 태우곤 했었다. 더 이상 부수고 태울 것이 없어졌을 때, 엄마는 아파트 고층 베란다에 난간 앞에 위태롭게 서서 하루종일 땅만 내려다 보았다. 그렇지 않은 날엔 그 어마어마한 분노가 고스란히 첫째 딸인 나에게로 향했다. 아빠와 닮았다는 이유로 엄마는 나를 미워했고, 아빠는 내가 당신의 원가족을 미워하는게 제 엄마를 꼭 닮았다며 나를 미워했다. 아주 오랫동안 참 많이 맞았고 온 몸에 퍼런 멍을 문신처럼 새기고 살았다. 그래서 한 때 내 별명은 가지였다. 아빠가 출근하지 않는 주말의 집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우리 남매는 나치 정권 하의 유대인처럼 방 안에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너무 배가 고파지면 몰래 부엌으로 나가 차가운 밥 한 덩어리에 보리차를 부어 잽싸게 방으로 들어오곤 했다. 동생이 보리차에 말은 밥을 한 수저 뜨면 그 위에 빨간 무말랭이를 하나씩 얹어주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조금 더 컸을 땐 주말마다 수영장에 가있곤 했다. 우리 남매에게는 그게 피난의 일종이었다. 수영장 문이 닫을 때까지 우리는 컵라면을 먹으며 헤엄을 치고 또 쳤다.

 

양친이 모두 계셨지만 나는 엄마와 아빠를 계모와 계부라고 여겼고,  밤마다 '진짜 친엄마'가 나타나서 나를 구출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사랑과 보호를 핑계로 통제와 폭력을 일삼는 부모가 너무 지긋지긋했지만, 가족이라는 끈이 너무도 불안하고 위태로웠지만, 그 끈마저 없으면 정말로 빼도 박도 하지 못하고 혈혈단신이 될 것 같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세상에는 그 불안하고 위태로운 끈 조차 없이 지내는 사람들도 많지 않던가. 그런 이들에 비해서 나의 상황은 비할 수도 없이 양반이라고 여겼다. 

아버지 어머니가 부재한 것처럼 느꼈고 그 빈 자리를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로 채우려고 했다.  10대 때는 따듯한 선생님들로, 20대에는 남자친구나 멘토가 될만한 어른들로 말이다. 학창시절에는 어떻게든 어른들의 따듯한 눈길을 받고 싶어 죽도록 공부를 하거나 멋들어져보이는 상을 받아온다거나 대외 활동을 했다. 어른들에게 "너 참 멋있구나", "너 참 대단하구나"라는 말을 들으면 숨통이 트였지만 그렇지 않으면 설 자리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20대에는 내 부모의 폭력성을 그대로 닮은 남자들을 만나며 고생을 했는데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났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적겠다. 연애가 지긋지긋해졌을 땐 삶의 모델이 될만한 '어른'들을 찾았고 그 분들을 통해 답을 구하려고 하거나 혹은 그 분들이 요청하지도 않은 온갖 일들을 자진해 떠맡으며 '수제자', '애제자'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모두 보기 좋게 실패했다.  공허함은 그렇게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적고자 하는데, 우선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조금 밝힐 필요가 있겠다.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부모님에게 맞곤 했다. 그 때 마다 나는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과 하는 것이 죽기 보다 싫어 악에 받힌 채 대들었고, 부모님은 나의 그 '지독한 고집'을 꺾겠다며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렸다. 정신을 잃으면 기절한 척 한다고 때렸고, 정신을 차리면 다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 그렇게 대치하는 시간이 반 나절 혹은 하루를 꽉 채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나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투항하는 심정으로 '다 내 잘못이오'하고 빌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꽉 깨물고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 굴욕감, 모멸감 같은 것들을 삼키고 나면 엄청난 무기력한 시간들이 찾아왔다. 

내 부모를 닮은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폭력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재현이었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성인이 된 나는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들에게 어린 시절보다 더 격렬하게 집요하게 저항했고 싸웠다. 하지만 딱 그 뿐이었다. 결국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피를 보고 정신을 잃고 살려달라고 비는 상황에까지 치닫고 나면 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투항했듯 내 모든 것-삶의 의지나 존엄 같은 것-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왜 '똑똑한' 내가 그런 일에 계속 휘말리는지 알 수 없다고 했고 내 운명이 너무 기구하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나 역시 더럽게 재수없는 사람과 일에 계속 휘말리는 내 인생이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석의 양극이 끌리 듯, 나는 내 부모와 닮은 사람들과 계속 엮였다. 머리로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바꾸고 싶었고 굴복시켜 사과를 받아내고 싶어했다. 그래서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실은 내가 정말로 바꾸고 굴복시키고 사과 받고 싶었던 대상은 내 부모였는데도 말이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이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이란 늘 위험하고 상처주는 존재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아주 외로워했고 또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 마음이 삶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나는 의도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상처를 덜 받는 편을 선택했다. 친밀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저자세를 취하거나 비굴하게 굴거나 어리숙하게 굴었다. 부모와 다른 성향의 사람을 만날 때는 매우 비겁했고 무책임하게 굴었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진 것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때로는 교묘하게 폄하하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 속 불편함을 '손쉬운 방법'으로 제거하며 살았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에도 굉장히 잔인하고 모질었다. 정말 잘 사랑하고 싶었고 잘 지켜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당시 나의 자질과 지혜가 모두 부족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그저 '나의 책임(했어야 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20대 중반에 이 친구를 만나면서 경험한 것은 단순한 사랑의 감정을 넘어선 '구원의 가능성'이었다. 평생 썩은 동아줄만 내려오다가 처음으로 금동아줄이 내려온 기분이랄까. 이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지만 동시에 이 사람을 잃게 될까봐 너무 불안했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엔 위험에 빠진 그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내가 죽는 등의 꿈도 많이 꾸었다.)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불안이었다. 어마어마한 불안을 어떻게 다루고 감당해야할지 몰랐던 나는 불편한 감정을 담고 있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한 채, 결국 이 모든 탓을 애먼 그 친구에게 돌렸다. 네가 확신을 주지 못해 너무 불안하다고 울고 불고 싸웠으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그 친구를 끊임없이 다그치고 탓하고 뒤흔들었다. 실로 비겁한 방식이었다.

내가 그 친구에게 요구한 것이 애시당초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그 친구와 이별하고 몇 년이 더 흘러서였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슨 짓을 해왔는가 깨닫게 되었을 때, 내가 그 관계에서 (해야했지만)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 -나의 감정적인 문제를 상대방에게 전가하지 않고 내가 해결하기, 진솔한 고백, 의심을 멈추는 것 등-를 마주했을 때, 내가 그 이의 삶에 남긴 수많은 상처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게 되었을 때, 나란 인간이 얼마나 비겁하고 비루했는가를 깨달았을 때, 죄책감과 미안함에 속절없이 앓았다. 

 

그 이에 대한 소식은 전혀 알 길 없지만,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그 이는 내게 그립고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친구가 얼마나 나에게 최선을 다했는지, 그 이가 보여준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잘 안다.  지금 내가 가진 소중한 인간적 자질과 자산 대부분은 그 친구 곁에 머물며 배운 것들이다. 정신분석을 받겠다는 결단도, 비겁해지고 싶은 순간마다 용기를 내려고 애쓰는 것도, 앞으로는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도 모두 그 친구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때가 내 쥐구멍에 볕 든 날이었다.

딱 하루,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 친구와 처음 연애를 시작한 시기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오전에는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막막해하고 불안해하는 스물 다섯의 나를 만나서 일러주겠다. 내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사랑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와 관점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러면 이후 내가 그 친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덜 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무해한 방식으로 나와 그 친구를 있는 그대로  지키고 사랑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후에는 그 친구를 만나 따듯한 밥을 먹고, 따듯하게 바라보고,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말하고, 많이 손잡고 안아주고, 정성스럽게 그 시간들을 보낼 것 같다. 그 어떤 상처도 주지 않고 반나절을 다정하게 보내면 좋겠다.

 

세월이 적잖게 흘렀으나 부모님의 삶의 태도는 변함없다. 여전히 비겁하고, 반성하지 않으며, 책임지지 않는다. 삼십대의 나는 늙은 부모님을 보며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윤리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지금은 안다. 부모님의 빈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채워질 수도 없고 그저 내가 평생 껴안고 가야 하는 무엇이라는 사실을, 오롯하게 나의 숙제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과거의 패턴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도. 

 

분석가는 올 한 해의 분석을 정리하며 내게 또 다시 약함과 악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약하기 때문에 악해지는 인간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이제 내 스스로가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나는 앞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 잘 생존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비겁하게 살지 않을 것이고 내 안의 욕망에 성실하게 응답하며 살 것이다. 주저하지 않고 미루워왔던 결단들을 할 것이다. 후회할 일 하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굳이 분석가의 표현을 빌려 오자면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분석가는 또한 내게 어떻게 생존을 해나갈 것인지 궁리해보라는 숙제를 주었다. 별 일이 없다면 그것이 연말과 연초의 화두가 될 것이다. 과거의 많은 습(習)을 끊어내기로 마음 먹었으니, 내년엔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다. 많은 실존적 결단들이 있고 그것을 자양 삼아 내가 의미 있는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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