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11. 03:25ㆍ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지난 사랑을 잊지 못하고 힘들어 하던 내게 결혼을 하자며 조르던 이. 상당히 오랜기간 지속된 그 이의 열렬한 구애에 나는 냉담하게 굴었고 아주 이상한 핑계를 대며 그를 피했었다. 그러다가 연락이 끊겼었던 그 이가 올해 초 연락을 해왔었다. 내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커피 한 잔 마시자고.
평소 같았으면 단박에 거절을 했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에게 그간 나의 무례함에 대해 굉장히 사과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던 상태였다. 나쁜년이 되기 싫어서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며 은근슬쩍 그의 구애에 어깃장을 놓았던 나의 행동 때문에 천성이 여린 그 사람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란게 불 보듯 뻔했고(상대의 천성이 여리고 여리지 않고와 상관없이, 그냥 내 행동이 분명하지 못하고 비겁했으니 빼박 내 잘못) 늦긴 했지만 그 이만 괜찮다고 하면 내가 저질렀던 과거의 못난 짓에 대해 직접 얼굴 보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만남이 성사됐고 나는 그 이와 나란히 서서 주변을 걸으며 사과를 했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콕 찝어 말할 수는 없는데 뭔가 되게 구린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들자 나는 내 스스로가 진짜 너무 미웠다. '미안하다고 말한게 불과 몇 분 전인데 난 왜 또 저 사람이 이상한 것 같냐! 나란 인간 겨우 이것 밖에 안되나'하고 자괴감도 들었다.
그런데 구린건 구린게 맞았다. 그 이는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자 괜찮다고 말하며 은근슬쩍 손을 잡으려 여 번 시도했고 그걸 거절 하니 그럼 친구로서 한번 안아달라고 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친구로 가볍게 안아줄 수 있는거 아니냐며 그가 찡얼거리기 시작한 순간, 정말 저 깊은 곳에서부터 빡침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지난 날 쌓은 두터운 업보가 있지 않은가? 업장을 녹인다는 마음으로 빡침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다시금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그 놈의 생떼는 점점 심해져갔다. 더 거지같은 뒷 이야기들아 더 있긴 하지만 생략하고, 어쨌거나 왜 이리도 업장을 녹이는 일이 괴로운가 생각하며 화를 참던 나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는 신파의 끝을 보이고 말았다!! 내가 너한테 너무나 비겁했다, 상처 준 모든 것에 미안하다, 다 내탓이다, 엉엉, 그리고 나는 여전히 너한테 전혀 이성적인 감정이 1도 없다, 엉어엉어어어엉, 난 그때나 지금이나 맘에서 못보낸 사람이 있고 그 사람 정리하기 전에는 아무도 안 만난다, 그렇게 안하면 스스로 보기 부끄럽고 떠나간 사람한테도 다시 올 사람한테도 못할 짓 같이 느껴져서 싫다, 꺼어어어어엉엉엉 꺼이꺼이ㅡ하고 (...) 울자 그 놈은 입을 열었다.
"아........... 오히려 내가 미안해..." 그렇게 그 놈이 꺼낸 놀라운 이야기.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리 속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내가 몇 년 간 알아오던 그 놈의 진심과 진실은,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과는 딴 판이었던 것.
그냥 그 놈은 나랑 잘 해볼 마음은 없이 한번 자려고 한건데 내가 그 놈의 구애를 그렇게 액면 그대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고 자기반성도 열라 했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더라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떠나 보낸 사람에게, 다가올 사람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다고 말한게 약간 감동이었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망할 놈의 자식은 자신이 내게 그간 했던 구라와 복잡한 사생활을 줄줄 불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보신각 종을 타종하듯 커다란 나무가 내 뒤통수를 퍽하고 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나는 내 눈 앞의 그를 단 하나도 제대도 알지 못한 채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한 것이다. 오히려 뭔가 찜찜하고 구리다고 생각했던 당시 나의 촉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절을 해야 할 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날의 그 사건은 내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망할 놈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결혼을 한단다. 놀라울 것도 없다. 그는 세상 착하고 착실하며 신의 넘치는 충실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심지어 돈도 많이 모아두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그 누구보다도 결혼을 간절히 원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와 더 깊은 연이 되지 않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토록 원하던 결혼을 하시니 부디 행복하시라. 축하는 못해주겠다. 이런 염치도 없는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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