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08:05ㆍ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내가 '아침이 되면 닭이 운다', '닭은 (꼬끼오하고) 운다' 는 사실을 알게 된건 순전히 동화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닭이 우는 걸 들어보질 못했던 일곱 살의 나는,
"알람 시계가 없었을 때 닭들은 자기가 알아서 울었는데 이제는 알람시계가 생겨서 안 우나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18살이 됐을 때 필리핀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당시 나는 민간봉사단체 워커로 단기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종일 일에 찌든 탓에 숙소에 들어오면 씻는둥 마는둥하고 눈부터 붙이던 때였다.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단잠에 취해 있는데 숙소 주변의 주택들에서 우렁차게 울려오는 닭들의 소리!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떼거지가 떼창을! 꼬끼오!
옆 집 닭이 울면 자기도 질세라 더 크게 꼬끼오하며 점점 커지는 닭들의 소리.
베개로 귀를 아무리 막아보고 귀마개까지 구입해 착용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The real group의 'good morning' 알람 5개를 맞춰놓고도 숙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던 내가 닭소리에 바로 깼으니
다른 워커들은 얼마나 더 예민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사람들은 닭이 울 때 마다 베개로 귀를 틀어막으며 '필리핀이 치킨집이 생겨야한다'고 짜증을 냈다.
문제는 닭이 우는 시간이었다.
책으로 닭을 배운 나는 '닭은 해가 뜨면 운다'고 알고 있었다. 실전은 달랐다.
닭이 울어 깨보면 별이 총총 빛나는 밤이었다. 닭이 우는 시간도 매일 달랐다.
새벽 네시, 다섯시는 양반이었다. 내 기억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무려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여긴 열대지방이라 한국보다 밤이 짧고 덜 어두운 탓에 닭이 시간 개념 없이 우는건가,라고 생각했다.
필리핀에서의 봉사가 끝나고 짐을 싸는데 사람들이 모두 닭에서 해방이 된다고 좋아했을 만큼
치킨집의 무서움을 모르는 필리핀 닭들의 울음소리는 정말이지 아찔했다.
그 이후로도, 필리핀이 아닌 다른 국가들에서 워커로 일하는 중에도 닭 울음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은 기억이 꽤 있는데
그래도 필리핀 닭의 목청을 따라오는 녀석들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소음 수준을 넘어서 지옥을 맛보는 느낌이 있다면, 나에겐 단연코 필리핀 닭 소리다.
어쨌거나 내가 아침부터 갑자기 닭을 소재로 글을 쓴 이유는
몇 달 전부터 우리 뒷집 부부가 키우는 닭 때문이다.
한 여름에 병아리를 왕창 들여놓으신 까닭에 여름 내내 그렇게 삐약삐약 소리가 멈추지를 않았는데
그 중에서 몇 마리는 닭이 된 모양이다. 몇 달 전 부터 시도 때도 없이 열심히 운다. 꼬끼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아침이 되서 닭이 우는게 아니다. 닭은 그냥 아무때다 자기 울고 싶을 때 운다. 꼬꾜.
어쨌든 녀석의 울음소리가 매우 거슬리기는 하지만 필리핀 닭 소리에 비해선 완전히 양반이기 때문에 가끔씩은 감사할 지경이다.
그리고 녀석 덕분에 휴대폰 알람에 철벽인 내가 꽤 아침 일찍 기상을 하고 있으니, 정말로 조금은 감사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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