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남자

2022. 1. 8. 20:52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처음 그 분을 봤을 때 유난히 시선이 확 갔었다. 이렇게까지 청정한 기운을 가진 남자라니! 그것도 30대에? 그를 볼 때면 마치 멸종위기종을 보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보기 드문 유형의 사람-특히 이 시대에-이 나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뭐랄까, 그저 고맙고 뭉클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소중하게 잘 보호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는 알면 알수록 '맑은', 그러니까 시쳇말로 무해한 사람이었다. 그의 다정하고 순한 성품은 큰 키와 우람한 덩치와 대비돼 더 두드러졌다. 심지어 그는 알면 알수록 유쾌한 사람이었다. 나는 확신했다. '이건 진짜 멸종위기종이다. 가깝게 지내야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성품에 대해 당혹스러움과 회의감을 느끼는 몇 가지 사건이 터지며 나는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는 맑고 순하지만 탁한 자에게 휘둘리고, 탁한 의도를 인간적인 정과 분간하지 못하고, 경계가 분명치 않고, 정당한 자신의 몫을 챙기지 못하며, 중요하지도 않은 타인의 일을 해주다가 정작 중요한 자신의 일을 하지 못하고, 다정하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관대한만큼 자신에게도 관대해 때때로 일을 그르쳤다. 그의 맑고 순한 성품이 호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분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동시에 '나의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누구보다도 선한 것과 순한 것을 혼동하고, 경계를 지키지 못하며 살아온 사람은 바로 나 아니었나?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시간과 돈과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던가? 그런 생각이 든 후에는 그가 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순진과 순수, 순함과 선함. 이 양자의 말이 흔히 '착함'으로 뭉퉁그려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되긴 하지만 실제로 두 단어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느낀다. 앞선 나의 삶은 그렇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진짜' 선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정말로 선한 의도를 갖고(교활하거나 비겁하게 자신과 타인을 속여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매우 많은 용기와 지혜를 요하긴 하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할 것이다.), 이성적인 관찰과 판단 위에서(특히 심정적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를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단호하게 윤리적인 결단을 내릴 것이다.(나에게 묻고 내 안에서 답을 끌어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결할 것이다.)  

 

아차. 그 분에게 잠시나마 심쿵하는 순간이 있었으나 금방 콩깍지가 탈각되고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그리고 요즘의 나는 이성과의 관계도 전무후무할 정도로 아주 클리어하게 잘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앞으로 마음 가는 상대가 생겼을 때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지침들을 조금 갖고는 있어야 될 것 같다. 이 지침을 살펴볼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잊지 말고 꼭 점검해보자. 

 

ⅰ) 나는 그가 왜 좋은가? 그는 왜 나를 좋아하는가? 

ⅱ)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인가? (솔직하고 선하며 성숙한 사람인가?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는가?)

ⅲ)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나는 그를 '남자'로서 인정할 수 있는가. 나는 '여자'로서 그 '남자'를 만날 것인가?*

* 여기서의 여자와 남자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성으로서의 남자와 여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ⅳ) 가치관 - 특히 성에 대해 갖고 있는 각자의 윤리가 충돌하지는 않는가? 정치적 지향은 어떠한가? 가족을 비롯한 인간관계, 돈에 대한 이슈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대처하는 방식은 어떤가? 

ⅴ) 기타

- 가능하다면 친구처럼 서로 오래 지켜보다가 진지하게 만나도 늦지 않다.

- 과거의 이성관계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면 묻겠다.

- 결혼/비혼주의자인지는 미리 체크하자. 

- 담배와 술 유무 - 담배 피는 남자는 거르자.

- 내가 생각해 볼 키워드들 : 비겁, 교활, 무경계, 독립, 주체적, 자립, 상호 인정(타인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며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등

 

적다 보니 느껴진다. 나... 이번 생은 연애 못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