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9. 00:09ㆍ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조바심 때문에 마음이 곧잘 어지러워지곤 하는 요즘,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펴 보니 짐이 부쩍 늘었다. 새로 사들인 대부분의 물건이 책이라 결국 책장을 하나 들였고 기왕 돈 쓰는 김에 눈 건강을 위해 스탠드도 하나 샀다.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나이는 먹어가고 잡동사니는 쌓여가는데, 내 안에도 쌓여가는 것들이 있기는 있을까? 없으니만도 못한 것들이 쌓일 바에야 먼지가 앉지 않게 잘 청소라도 해야 할텐데 묵은 먼지로 자욱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외할머니를 모시고 강원도에 다녀왔다. 할머니에게 오대산의 단풍길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들 투성이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받지 않겠다는 용돈을 억지로 쥐어주셨고 나는 여전히 할머니 앞에서 영락없는 어리광쟁이 손녀였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그 사이 많이 늙었고 걸음이 어려워지셨지만 총기만큼은 여전하셨다. 문득 문득 할머니의 나이듦이 느껴질 때 마다 목이 멨고, 나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할머니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 나를 계속 걱정하셨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에 그냥 친구에게 말하듯 편하게 요즘의 내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아무리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또 말해봤자 할머니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거라고, 인연을 못 만난거라고, 뭣 모르는 학생 때 결혼을 했어야 하는데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려 때를 놓쳤다고, 향후 1~2년 안에는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할머니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마음이 불쑥 불쑥 치고 올라와서. 능력 좋고 돈 잘 버는 부자 남편을 만나 팔자 피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소원은 이번 생에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미안, 할머니. 그래도 저 잘 살게요.
피해의식, 남 탓, 조바심 - 요즘의 내가 가장 피하고 싶거나 두려워 하는 것
미루지 않는 것, 정리(체계화), 책임감, 성취를 위한 선택-집중-투신, (일의) 매듭을 짓는 것. - 요즘의 내게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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