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물

2018. 1. 3. 12:09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1. 

사람들마다 다른 내면의 깊이를 수심에 비유해 보면, 내 수심은 아직 옹달샘 정도가 아닐까 싶다.

육안으로도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손을 넣으면 곧 바닥을 짚을 수 있는 그 정도의 깊이.

별 것 아닌 일로 예민해지고 작은 일에도 크게 흔들려 버리는 까닭이 모두 이런 이유에서 올 거라고 짐작한다. 

그간 내가 만나왔던 세상이 옹달샘 정도의 크기라서 그런건 아닌가.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세상의 크기가 너무 제한적인 것은 아닐까. 

이 물이 천으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 더 깊고 넓어지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 걸까.

 

2. 

그가 밥을 해주겠다며, 저녁을 먹으러 오라는 제안을 했는데 아주 개념없는 방식으로 거절했다.

집도 못가고 몇 날 며칠 야근을 할 때, 그는 자기 방에 있던 데스크탑을 뜯어 우리 사무실로 와서 일을 도와줬고, 

심지어 돈 한 푼 안 받겠다며 떼를 썼다. 언젠가 내가 밥도 못먹고 일하고 있을 땐, 그가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근방으로 와서 밥을 사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일손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는 자기 일처럼 나서서 일손을 구해주기도 했다. 내가 매몰차게 그의 마음을 거절해도, 그는 늘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챙기고 보살폈고, 내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하는데?'라고 물으면 그는 '정말 몰라서 물어? 너니까.'라고 대답하곤 했다. 

얼마 전, 그는 술에 취한 채로 자기와 결혼할거냐고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기 같은 남자 세상 어디서도 없을건데 큰 실수 하는거라고. 그렇게 나에게 따듯했던 그와 관계를 정말로 뚝 자르려고 한다.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희망고문 같은거 해서는 안되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담백한 친구사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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