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변화

2021. 9. 2. 22:0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연애 없이 사는 생활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혼자 지낸 시간이 해를 두 번이나 넘겼고, 이대로라면 또 이번 해 역시 이변 없이 넘어갈 것이다. 주변의 걱정스런 우려는 점점 쌓여간다. 부모님이야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지인들도 조심스럽게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결혼은 안하더라도 사랑이나 연애는 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예쁜 나이를 왜 그렇게 보내냐고. 하지만 정작 나는 지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다.

깊은 물 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다 간신히 헤엄쳐 나와 이제서야 겨우 숨통을 튼 것 같은데,  물 속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물 속에 들어가는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오고 물만 봐도 지긋지긋한 그런 상태인데, 뜨거운 뙤약볕 밑에 누워 힘겹게 되찾은 평화를 누리는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한데, 해 떨어지기 전에 바닷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잠수통 매고 부랴부랴 입수하는 다른 사람들 따라 나도 들어가야만 하나. 도대체 그런게 어딨어.  

 

솔직히 사랑이라는 말에 지긋지긋한 환멸감을 느낀다. 위선과 비겁, 기만을 '사랑'으로 포장하며 자기 스스로와 상대를 속이는 것이 제일 넌덜머리 나지만, 또한 일평생을 달리 살아온 타인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도, 가장 가까운 자리를 내준다는 것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도 너무 risky하게 느껴진다. 힘겹게 일궈낸 '단조로운' 일상이 산산히 부서질까봐 두렵고 불안하다. 

 

가까운 사람들이 배우자나 연인과의 문제로 힘겨워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지곤 한다. 특정 기준에 미달하는 파트너가 못마땅해 끊임없이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전가하거나 하는 지인들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갑갑해진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더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연애 하지 않는게 역시 최선이다'라는 결론이 나버리고 만다. 그런 생각이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걸 알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걸 감당할 맘의 여유가 없다.  

 

그 와중에 다행인건 몇 년 동안 용을 써도 별 차도가 없던, 첫사랑을 마음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근래 조금씩 진척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은 그 지지부진했던 작업에 갑자기 속도가 붙게 된 주효한 계기가 하나 있었다. 내가 내 인생 최악의 남자들을 떠올리다가 어쩌면 그 친구가 생애 최악의 여자로 나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어떤 결심이 서게 된 것이다. (내 인생 최악의 남자들이 나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소름이 끼치니까! 그 친구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나!!ㅠ) 그리고 그 친구만큼이나 나 역시도 그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면서, 사랑하는 남자와 스스로의 마음에 새빨간 생채기를 잔뜩 내버리고야만, 그래서 너무 꼴보기 싫었던 20대 중반의 나를 어렴풋하게나마 껴안게 되었다. 애썼다고, 고생 많았다고. 그 말을 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스스로에게 처음 해주었다. 

 

그 때부터 부쩍 그 친구와 관련된 꿈을 많이 꾼다. 꿈 속에서 나는 그 친구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처 하지 못한 진심어린 미안한 마음을 꿈에서 전하기도 했다. 잠에서 깨면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떠나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늦었지만 이제서야 이별을 시작한다. 속도는 느리지만 결코 풍화될 것 같지 않던 기억들이 조금씩 깍이고 부서져 나간다. 알약이 조금씩 물에 녹아 사라지듯. 그 친구와 그 시절에 대한 애정과 감사, 애틋함만 남긴 채로 서서히 아득해져간다. 다행이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날이 올까? 물론 알 수 없다. 주변의 성화에 못이겨 스스로에게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보채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이나 없다. 하지만, 살다가 한번쯤은 그런 무모한 결심을 하게 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풍덩,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 속으로 몸을 내 던지는 날 말이다.  

 

덧) 연애 하며 반지를 나눠 껴 본 경험이 전혀 없는데, 무슨 똥고집이었는지 나 역시도 결혼할 줄 알았던 남자랑 내 생애 첫 커플링을 끼고 싶어서 내돈내산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다가 평생 반지는 요원할 것 같아서, 요즘 시간 될 때마다 짬짬이 찾아보고 있다. 레이어드링? 싱글링?  도대체 그 반지란게 뭔지. 바보 같이 이렇게 오랜 시간 질질 끌어왔을꼬.  어쨌거나 최대한 많이 사서 낄 수 있는 손가락이란 손가락에는 다 낄 생각이다. ㅋㅋ 반지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껴주겠어. 열 손 가락에 반지를 가득 낀 멋진 싱글 할머니로 늙는거야!

 

 

(22년 9월 덧붙임)

결국 반지(싱글링)는 사지 않았다. 그런데 팔자에 없는 줄 알았던 커플링을 곧 하게 할 것 같다. 인생이란 참 신묘하다... 

 

 

(23년 1월 덧붙임)

커플링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었다.

솔직히 나는 처음 남자친구가 반지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좀 시큰둥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커플링을 매우 진심으로 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마음을 바꿔 먹기로 하였다. 남자친구는 자신이 커플링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도 나름대로 며칠 부업(?)을 해서 반지값을 마련해 별도의 통장에 묶어두었다. 꼭 오빠가 선물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정말 오빠가 커플링을 원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