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수치심을 자각하는 순간

2021. 8. 18. 02:2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푸코의 책으로 진행된 지난 책 모임은 정말 곤욕스러웠다. 책을 읽는 일주일도 꼬박 그랬지만, 모임을 하는 3시간은 정말 뇌가 붕괴되는 것만 같았다. 짜증이 최고조에 다다랐던 나는 모임 중간에 선욱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짜증을 내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에~? 그게 짜증을 낸거였어? 너 짜증 낼 줄 모르구나?"하고 끝나서 다행.) 

 

그 순간 참을 수 없을만큼 짜증이 났던 이유는 나 자신이 그 곳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간 씨름한 텍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상황에서 겉돌고만 있는 것 같았고 외부 세계를 파악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느낌이었다. 뭐랄까. 마치 문어가 자신의 다리와 빨판을 주변 사물들에 흡착하며 자신을 둘러싼 외부 상황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듯 나 역시도 책에 대해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의 대화에 대해서 흡입렵있게 이해하고 싶었는데, 막상 내가 가진 빨판은 주변 대상들을 흡착하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내게 있어 그다지 낯선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적합하지 않은(외부 상황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지 못하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근본적으로 융화될 수 없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자리에 있는 것만 같은)사람 같다"는 생각은 밀물처럼 주기적으로 나의 생활을 침범해 들어와 괴롭히는 대표적인 불청객이었다. 그래서 종종 분석가에게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에 대한 성토를 하곤 했었다.

 

동그라미들이 모인 무리와 함께 있을 때는 내가 마치 뾰족한 삼각형인 것처럼 느껴져 날 선 각을 숨기려 애를 썼고(그것이 발각되면 추방 당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막상 뾰족한 삼각형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내가 가진 각이 그들만큼 뾰족하지 않고 둥글게 느껴졌고 내 것이 아닌 자리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은 채 지금 내가 뾰족한 삼각형인척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가 하고 괴로워했다. 동그라미도 삼각형도 아닌 존재, 그 어정쩡한 경계에서 이도 저도 아니고 겉도는 듯한 기분, 동그라미들이 자유롭게 굴러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러지 못하는 내 모습이 무력하게 느껴졌고, 삼각형들이 뾰족하고 첨예하게  핵심을 찌르고 들어갈 땐 나의 무딘 각으로는 그것들을 짚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창피해 상대적으로 둥근 나의 각을 숨기거나 숫돌에 갈곤 했다. 

 

조건 없이 사랑받기에는 나란 존재가 어딘지 모르게 적합하지 않고 중요한 것이 결여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 밑에는 깊은 수치심이 자리하는 듯 하다. 나란 인간이 태생적으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친밀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벌어지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애초에 잘못된 인간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며 스스로에게 혐의를 씌우곤 했던 행동 역시 모두 수치심이라는 뿌리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며칠 전에는 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양서를 많이 보유한 도서관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는데, 그것도 잠시, 도서관 직원이 책을 대출하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시간 낭비하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하라. 나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안다. 솔직히 말하겠다. 당신 같은 사람은 재능이 없고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불쾌하고 심란했지만 "차라리 빙빙 에둘러 말하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는게 낫다"고 답한 뒤, 책을 빌리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떴다. 

하지만 만약 다시 그 꿈을 이어서 꾼다면 나는 그녀의 무례한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내가 이곳에 어울리는지 안어울리는지와 같은, 아무 영양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질스럽기까지 한 기준에 갇히지 않고 진실로 자유롭게 '나'로 존재하고 싶다. 

 

이제 나는,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안다. 세상에 완벽한 동그라미들만 모여있거나 완벽한 세모들만 모여있는 사회는 없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그라미와 세모의 중간 그 어느 지점에서 어정쩡하게 존재하고 있고 엄밀하게는 그 모양이 제각기 다 다르다는 것.

요즘의 나는 스스로에게 더 완벽한 동그라미와 세모가 될 필요가 없으며 그저 나는 나로 존재한다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일러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상대(특히 엄마)에게 역시 더 완벽한 동그라미와 세모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을 멈추는 연습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완벽한 동그라미와 세모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자신과 더 딱 맞는 조각을 찾아 내기 위한 노력도 아니요, 단지 내가 나로서 잘 존재하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려는 노력만이 허락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