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욱과의 대화

2022. 4. 18. 04:03당분간 머무를 이야기

오랜만에 선욱과 전화를 하고 난 뒤 적는 글. 선욱과 나눈 이야기도 있고 선욱과의 통화와는 무관한 근래의 이야기도 섞여있다.

 

1. 선욱이 말했다. '단절을 계단처럼 밟아가며 앞으로 나가야해.' (그리곤 자기가 한 말에 흡족했는지 '아, 또 명언 나왔네!'라며 좋아했다.) 선욱의 말처럼 결단이나 상상, 변화는 고립과 단절로 부터 찾아오는 것이리라. 나는 기꺼이 단절의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2. 지난 번의 통화와 마찬가지로 나는 윤을 찍은 선욱에게 '연인에게 안 좋은 점이 보인다고 차라리 쓰레기를 만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냐'며 쓴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그것이 본의 아니게 선욱에게 어떤 연상 작용을 하게 한 듯 하였고, 덕분에(?) 선욱의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욱은 자신에게 '윤'이라는 성이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주었는데 너무 놀라운 이야기였다. 나도 놀랐지만 선욱도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3. 저항에 끊임없이 break through하는 것이 프락시스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내가 겪고 있는 '무딘 상태'는 저항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 

 

4. 공부를 하기 싫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닐까? 왜?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눈으로 확인하게 될까봐? 

 

5.  어제 꿈에선 그 친구가 나왔다.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친구 곁에는 (여자친구인지 결혼할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초면의 여자가 있었고, 그 친구는 나에게 냉랭하게 굴었다. 나 역시 이미 그 친구를 맘 속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그 이의 냉랭한 표정을 봐도 큰 동요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내가 그에게 따로 이야기 좀 하자고 말했다. 그 이는 귀찮고 짜증이 나는 표정이었고('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같은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사석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뭔가 딱히 해야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듯 싶다.  (사과를 하고 싶었을까?)

 

꿈에서 깨고 난 뒤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이미 맘으로 정리가 거의 끝난 상대를 꿈에서 붙잡았다는 사실이 묘한 좌절감을 불러왔다.

생각해보면 그 친구를 정리하는데 속도가 나기 시작하면서 부턴 묘하게 그 사람에 대한 꿈을 종종 꾼다. 꿈에서라도 봤으면 하고 바랐을 때는 절대 나오지 않던 이의 모습이 맘에서 떠나 보내면서 부터는 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꿈 속에서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긴 대화를 한 뒤 화해를 하고 다시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내용이 많은데, 꿈에서 깨고 나면 '도대체 왜?'라는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 

 

지지난주 였나? 서울에 올라갔다가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한 소절('그대 오직 그대만이 내 첫사랑 내 끝사랑')을 듣자마자 그 친구를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많이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제대로 사랑을 하지는 못했고,  끝을 받아들이지 못한 시간이 연애를 했던 기간보다 길었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떠나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이젠 그 친구의 빈 자리가 허전하기 보다는 익숙하고 예전만큼 힘겹지 않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이젠 다른 누군가를 들여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고.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세상에 신이 있다면 어린 나의 부족함을 껴안고 기꺼이 버텨준 그 친구에게 많은 은총을 내려주었으면. 

 

6. 잊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들은 잊지 않으려 애를 많이 쓴다. 세월호가 그렇다. 4.16일 토요일, 대전에서는 추모제가 열리지 않아 혼자서 조용히 추모를 했다. 

 

7. 면접에서 만점이 나왔다는 사실에 으쓱했던 날도 있었고(그 이야기를 들려준 지인의 말로는 면접 위원들이 극찬을 쏟아냈다고.. 당연하지, 나 말고 다른 면접자들은 아예 자격요건 미달인데. 그런 양반들만 보다가 유일하게 자격요건을 채운 면접자를 보면 얼마나 반갑겠나. 좋아할 일도 아니고 창피해할 일.), 일 참 깔끔하게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뿌듯했던 순간도 있었고, 학생들이 '참선생'으로 치켜 세워주는 것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었만, 요즘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정작 내 인생에 중요한 일들은 전부 후순위로 미뤄두고 있지 않은가. 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 것인지, 하고 싶지가 않아서 안하는 것인지 답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확실히 후자다. 그 생각만 하면 속이 갑갑하고 체한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믿는 어른 혹은 프로는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해 책임을 지는 인간이니, 꾹 참고 가자.  

 

8. 기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회상이 중요하다는 분석가의 말에 십분 공감이 된다. 플랫한 생각을 좀 더 볼록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한 두달 정도 미룬다고 죽지 않으니 우선 벌여놓은 일부터 처리하는걸로.

 

9. 일을 같이 하는 사람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남동생과 오버랩 되는 사람인데... 뭔가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분명 일과 관련된 이슈일텐데 무엇일까... 이제 나도 사회생활 중 자문을 하거나 의견을 전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귀한 일이지만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리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나는 좋은 선배가 될 수 있을까? 

 

10. 최근 국제기구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 6년 동안 일해오며 만난 기관 중에선 가장 '거물급' 상대인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어느 모로 보나 쉽지가 않다. 최종 컨펌자까지와의 길이가 너무 길다보니 일이 수시로 엎어지고 하루가 멀다하고 일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버리곤 한다. 그러다보니 4월 말에 종료하기로 약속했던 과제는 아직까지 첫 삽을 뜨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중간에 계시는 담당자들은 예산에 비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시고. 그 분들이 왜 그런 요구를 하실 수 밖에 없는지 잘 알지만(나도 그들처럼 최고로 멋진 결과물을 뽑고 싶다), 또 내 역할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항을 '불가능하다'고 정확히 말하고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대안을 찾는 것이기도 하기에...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드리려고 한다.  

 

상황을 잘 모르는 주변 지인들은 '어떻게 그런 클라이언트와 일하냐'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우지만 실상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말리기에 바쁘다. 이 일을 하는 사람 중에 누구 하나 애 쓰지 않는 사람이 없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중간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기관 담당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미쳐버리려고 하고, 모든 작업의 끝에 있는 나 역시도 매일 매일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지낸다.  어쨌거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하는 생각은 (1) 프로젝트 중간 관리자의 역할과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2) 제작업체의 대표로서 어떤 것이 정녕 책임감 있는 자세인지, (3) 클라이언트와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소통할 수 있는지 등이다.

그들은 알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실로 그들과 원 팀이라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이윤이 적게 남아도 좋으니 그저 정말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담당자들과 당면한 문제를 잘 해결하고 이 무거운 기분을 훌훌 털어내고 싶다.  

 

10. 한 시간 남짓 쓴 글을 다시 보니 내 생각이 얼마나 두서 없고 깊이가 떨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다음에는 한 가지 주제를 잡아 조금 깊숙히 파고드는 글을 써야겠다. 그럴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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