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소국

2013. 11. 18. 03:08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지난 이야기


오늘은 정말 구렸다. 오늘은 14일도 아니고 달거리 기간도 아니고 과거의 중요했던 어떤 날도 아닌데 그랬다. 악몽이야 으레 꿨다쳐도 오늘은 유난했고, 이유없이 축축 처지는 기분은 완전히 제어가 안됐다. 설상가상으로 매사 유쾌한 그가 특유의 통통 튀는 화법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순간에도 나는 집중하지 못하고 작년 이맘의 기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거절을 하면서 "이게 다 눈 때문이야"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첫 눈은 굉장한 핑계였다. 굳이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놔서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는 나와 직면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는 내게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도도하냐며 한숨을 푹 쉬었는데, 나는 제발 그 이의 말대로 내가 사랑 앞에서도 도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처지는 기분은 어쩔 수가 없어서 결국 나는 첫 눈을 '기념'해 '엄마에게 드릴' 소국을 샀다. 꽃집에 가니 주인 언니가 반갑게 맞아주며 작년 이 맘에 엄마 드린다고 스톡 사갔었던거 기억하냐고 물었다. 나는 아루(꽃개라고도 한다. 꽃집개의 줄인 이름.)를 쓰다 듬으며 "노란색 프리지아였어요."라고 대답했는데 언니가 "맞다, 너는 스톡이 예쁘다고 했는데 내가 프리지아가 낫다고 했었지."라며 웃었다. 축축 처지는 야리야리한 보랏빛의 꽃을  내가 뚫어지게 바라봤던 그 날 밤의 모든 순간. 그리고 내가 더 들떠 있었던 소중한 날의 저녁, 사랑하는 남자가 안고 들어왔던 스톡. 며칠 전 한껏 헝클어져 풀다 만 뜨개실처럼 머릿 속이 엉키는 기분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언니는 "이번엔 소국 가져가"라며 소국을 포장했다.


첫 눈과 연애라는 예쁜 말 안에 담긴 차갑고 혹독한 벽이 왜 다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왜 내 마음은 아직까지도 그 벽 앞에서 쩔쩔 매는지, 수없이 튕겨져 나오면서도 끝이 아닐 거라는 실마리를 찾으려 했는지, 아직까지 발악을 하며 그 때의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지 알 길이 없다. 그 놈의 사랑이 뭔지, 마음은 뭔지, 연애는 뭔지, 첫 눈은 뭔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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