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필사' 중 메모

2020. 9. 7. 20:13관찰과 기록, 성찰과 결행/공부와 스크랩

단상메모(<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6쪽)

≫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 세상이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 퇴화한 집오리의 한유(閑遊)보다는 무익조의 비상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훨씬 훌륭한 자세이다.

≫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 인내는 비겁한 자의 자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투쟁은 그것을 멀리서 맴돌면서 볼 때에는 무척 두려운 것이지만 막상 맞붙어 씨름할 때에는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창조의 쾌감 같은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사간 집을 찾으며-부모님께(<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43쪽)

이번의 이사는 물론 그런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기해년의 이사처럼 송두리째 고향에서 뿌리를 뽑는, 모든 이웃과 공동체로부터 단절되는 '실향'도 아니며, 더 높은 비탈의 세가로 오르는 '등산'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원래 이웃이 존재하지 않는 서울살이이고 보면 사람을 떠나는 아픔 같은 것과는 아예 인연이 없는, 단지 일정한 중량과 부피의 역학적 이동이 수고의 대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업체같은 고층 빌딩 속에서 대체 어떤 모양의 가정이 가능한 것인지, 아버님께서는 수유리의 산보로를 잃고, 어머님은 장독대를 잃어 갈 데 없이 TV 할머니가 되지 않으시는지. 생활의 편의와 이기들이 생산해내는 그 여유가 무엇을 위하여 소용되는지, 그 수많은 층계, 싸늘한 돌계단 하나하나의 '높이'가 실상 흙으로부터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나 아닌지...

 

- 현대사회에서 이사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이사의 경험들은 어떠하였을까? 무엇이었을까? 내부모의 이사는 무엇이었을까? 

- 현대의 주거 공간 속에서 우리가 잃어온 것은 무엇일까? 그 속에서 생활은 공간과 어떻게 밀접한 연관성을 갖을까?

 

 

<저마다의 진실-계수님께>

(중략)뿐만 아니라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섬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사람이 산골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아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바라볼 수 있는가? 물론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릿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 나는 어리석다고 깔보는 사람이었지. 맞아 가치중립적인 관찰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버이다. 굉장히 관념적인 사고방식에 의존하고 있던 것. 확실함. 하지만 이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하지는 않아? 리안언니를 보면 경험적인 단단함? 같은 것들이 정말 부럽기도 하다. 

 

 

간고한 경험-아버님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11p)

여름 더위 속에서는 책도 힘들어집니다. 여름은 역시 피서(避書)의 계절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생(生)을 잇고 있으며 또 누군가의 생으로 이어집니다-보리수 그늘에서 (더불어숲)

우리는 어린 손자의 모습에서 문득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어린 손자를 통해 할아버지가 계승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비단 혈연을 통한 계승뿐만 아니라 사제(師弟), 붕우(朋友)등 우리의 인간 관계를 통해 우리의 존재가 윤회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의 존재는 누군가의 생을 잇고 있으며, 또 누군가의 생으로 이어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어지는 윤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마치 이 보리수처럼 이승에서 이어지고 있는 윤회는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개별적인 존재로 윤회할 뿐만 아니라 사회라는 집합체도 윤회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다라처럼 얽히고 설킨 인연으로 사회를 만들고, 그 사회는 다시 다음 사회로 이어지는 사회적 윤회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존재’의 윤회가 아니라 ‘관계’의 윤회입니다. 자녀에게, 벗에게, 그리고 후인들에게 좀더 나은 자기가 계승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좀더 나은 세상으로 윤회되기를 원하고 있음에 틀립없습니다. 그런 의미의 윤회를 불가(佛家)에서 윤회라 부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나의 생각을 윤회라는 그릇에 담아보면 그런 것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모처럼 숨막히는 신발 속에서 풀려나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쉬고 있는 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몸의 무게에서 해방된 발이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문득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후인들의 이정표가 되리라며 스스로의 행보를 자계(自戒)하던 고승(高僧)의 시구가 생각납니다. 머리보다는 발이 먼저 깨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윤회되는 것이기보다 발(行蹟)이 윤회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도의 빛’을 찾기 위하여 벌써 여섯 달째 인도를 여행한다는 젊은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순수한 의미의 개인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사회 역사적인 관련을 개인이라는 단독자로 환원하고, 그 외로운 단독자를 윤회라는 무궁한 시공 속으로 던져서 해소시켜버리는 해탈의 철학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혹시 기존의 모든 삶을 초개처럼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승의 모든 부조리를 통째로 승인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철학에는 이승에 태어나 이승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까지 방기해버리는 위험은 없는가. 나는 궁극적 본질을 찾아 구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그와의 대화가 어려웠습니다. 깨달음이란 어느 순간에 섬광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는 그의 수첩에서 ‘성공은 과정(Success is not a destination but a jouney)'이라고 적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지도를 펴고 석가의 편력을 연필로 그려보았습니다. 석가의 세계는 인도 동북부의 매우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그 넓이로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하는 일’ 없이 ‘보는 일’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많지 않은 법입니다.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시선을 거두어 오로지 안으로만 동공을 열어두는 것이 사색이라면 그러한 사색이 포괄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결국 각자의 삶과 각자의 일 속에서 길어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나마도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결연함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오늘의 깨달음 위에 다시 내일의 깨달음을 쌓아감으로써 깨달음 그 자체를 부단히 높여나가는 과정의 총체일 뿐이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궁극적 존재에 대한 고뇌가 남는다면 최후로 인도를 다시 찾아올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인도가 도달한 ‘힌두의 세계’는 인도의 척박한 땅과 숨막히는 계급 사회를 살아가는 인도 사람들의 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인도에 오면 수많은 성자(聖子)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자가 없는 사회도 좋은 사회라 할 수 없지만 성자가 많은 사회도 결코 행복한 사회는 아닌 법입니다. (후략)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더불어숲)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히기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昔之人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 이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물론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 문화에서 유목 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되고 청년들의 전위 문화前衛文化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가게 마련입니다.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이지요.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새로 배운 단어

1. 석별: 애틋한 이별, 이별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

다만 가까이서 자주 들르던 수유리 누님 두 분이 작은 석별이나마 감당해야 할른지...

2. 세가: 세를 들어 사는 집, 셋집

3. 한유(閑遊): 한가히 노니는 것

4. 무익조: 날개가 없는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