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뮈리엘 바르베리/아르테
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아르테
원작에 푹 빠져 책장을 덮자마자 영화도 찾아 봤으나 영화는 별로였다.
책갈피
노동자 집단은 마르크스의 작품에서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일단 그냥 읽기조차 어렵다. 마르크스의 글은 품위 있고 문장은 치밀하며 명제는 복잡하다. … 즉 욕망 속에서 길을 잃은 인류는 자신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향유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는 확신 말이다. 과도한 욕망에 재갈을 물릴 그 세계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사회기구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 투쟁, 억압, 유독한 위계질서, 이 모든 것이 말끔히 씻긴 사회 기구가. 욕망의 씨를 뿌리는 자는 억압을 거두게 될 것이에요.
누구도 이해받을 수 없는 힘든 결정을 내릴 때는 그 무엇도 우연에 맡겨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나 몇 살에 죽느냐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순간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다. 다니구치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면서 죽는다.
아파트도 딸도 없다면 그들은 죽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진짜 귀족. 귀부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저속함에 둘러 싸여 있어도 저속함이 건드릴 수 없는 여자를 말한다.
취미의 부재는 존재의 무에 가깝다.
사람들은 의식의 자각이 우리의 출생과 일치한다고 잘못 생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출생 말고는 다른 생명의 상태를 상상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의식이 도래하려면 어떤 이름이 필요하다.
인간은 인간이기 시작한 이래 그다지 많이 진보하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우연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으며, 대다수의 호의적인 신들이 자신의 운명을 돌봐준다고 믿을 뿐이다.
냉소적인 사람은 유치함 자체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의미가 있다고 악착같이 믿으며 유년시절에 체득한 유치한 관념들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인생은 엉터리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고 질리도록 인생을 즐길 것이다.'라는 말은 불만에 찬 유치한 인간의 말 뿐이다.
정말로 사람들의 믿음과 달리 사회의 위계질서 내에서 누구나 자신의 무능력에 정비례하여 위상이 높아진다면 장담컨대 세상이 지금처럼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저 문장의 의미는 무능력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만큼 혹독하고 부당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은 행위가 아닌 말이 힘을 갖는 세상, 최고의 능력은 능변인 세상에 산다. … 우리는 가장 약한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아주 끔찍한 모욕이고 타락이며 깊은 모순이다.
수위에게 죽음은 삶이 진행되는 동안 일어나는 당연한 일이고, 부자들에게 그것은 부당함과 비극적인 참사라는 옷으로 뒤덮여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콜롱브와 있으면서 무서운 건 종종 그녀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을 때다. 콜롱브가 감정이랍시고 드러내는 것은 모두 꾸며진 것이고 가짜라서,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느끼기는 하는지도 의문이다.
운명 속에 감금된 각자는 핑계대지 말고 그 운명과 마주해야 한다. 어떤 환상을 품었든 인새으이 마지막 장에는 누구나 자기 본래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고급 란제리를 만지작거린다고 환자가 건강을 되찾거나 인생의 마지막에 더 큰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차의 의례는 정확한 몸짓으로 절제된 시음 과정을 유지함으로써 단순하고 진정하고 세련된 감각에 도달하게 한다. 차는 부자와 빈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적은 돈으로도 우리 모두 미각의 귀족이 될 수 있으며 우리 인생의 부조리 속에 고요한 조화의 틈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공허함과 결탁했고, 길 잃은 영혼들은 아름다움에 눈물지으며, 무의미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니 한잔의 차를 마시자. 침묵이 형성되고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가을 나뭇잎들이 살랑대며 날아가고 고양이는 따듯한 불가에서 잠잔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시간은 승화된다.
자신을 증오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해할 것이다. 그 증오는 사람을 살아 있으면서도 죽게 만들고, 자신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구토를 느끼지 않으려고 나쁜 감정은 물론 좋은 감정까지 모두 무감각하게 한다.
견디기 힘든 것은 기다림이다. 싸워봤자 소용없음을 느끼는 어쩔 수 없이 도달할 그 순간을 기다리는 일.
부자와 빈자, 이론가와 실천가, 정책결정자와 노예, 선인과 악인, 창조적인 사람과 고지식한 사람, 조합주의자와 개인주의자,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등 모두 퇴장이다. 이들은 원시 영장류에 불과하다. 그들의 표정과 미소, 걸음걸이와 장식물, 언어와 사회 코드는 모든 영장류의 유전자 카드에 기록된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즉, 자기 대열을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 그럴 때 우리에게는 절망적으로 예술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신적 환상과 다시 관계 맺기를 열망하고, 무언가가 우리를 상물학적 운명에서 구해주어 모든 시와 위대함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열정적으로 바란다.
진정한 새로움이란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는ㄷ거야.
인생의 변화 그 속에서 영원을 성찰하는 것
소리를 제거하는 것은 2유로 짜리 소시지를 싸고 있는 질 좋은 종이를 걷어내는 것과 같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텔레비전 뉴스를 이런식으로 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러면 뉴스란 서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이미지들의 나열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이미지들을 연속해서 내보내며 사실들의 실질적인 연속으로 만드는 해설이 바로 뉴스다.
만약 문학이 사람들이 자신의 거울 뉴런을 발동해서 힘들이지 않고 전율을 느끼기 위해 쳐다보는 텔레비전이라면? 설상가상으로 문학이 우리가 망친 모든 것을 보여주는 텔레비전이라면?
문명은 제어된 폭력이며 영장류의 공격성에 대한 미완의 승리다.
기술적 용어의 정확함에서 발생하는 그 휴식은 엄밀함의 환상과 단순함의 전율을 안겨주고,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이나 창작의 고통, 숭고의 지평선을 향한 끝없는 열망도 희망도 없는 시공간적 차원을 불러온다.
우리는 동물이고 앞으로도 동물로 남을 것이다. 부자네 암고양이도 문명화된 여자들을 괴롭히는 똑같은 질병으로 괴로워한다. 이것은 고양이 학대라며 분개하거나 순진한 가축 종족이 인간 때문에 오염됐다고 고함을 칠 일이 아니다. 반대로 그 사실은 동물들으리 운명을 이어주는 깊은 연대감을 윌에게 가르쳐준다. 걔네나 우리나 같은 욕구를 갖고 살며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다.
가난한 자들이 혐오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른 가난한 자들임을.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늙어가며, 그것은 아름답지도 좋지도 즐겁지도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온 힘을 다해 지금 뭔가를 구축해야 한다. 매일 자신을 극복하고 그 매일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양로원을 항상 머릿속에 떠올려야 한다. 자기만의 에베레스트를 한걸음 한걸음 기어오르고, 그래서 그 발걸음이 조금씩의 영원이 되게 해야 한다. 미래, 그것은 산 자들이 진정한 계획을 가지고 현재를 구축하는 데 쓰인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불행한 이유가 다양하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확신하는 것 너머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만남을 단념했다는 것, 이 영원한 거울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면서 자신만을 만나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 속에서 결코 자신밖에 바라보지 않으며 우리는 모두 사막 속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나는 문법이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이라 믿는다. 말하거나 읽거나 쓸 때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었거나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아름다운 표현이나 문체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법을 공부하면 언어의 아름다움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문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언어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고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바라보는 것이다.
로젠 부인의 장롱과 창고엔 뭐든 두 개 씩 있어요. 그게 그녀를 더 행복하게 할까요? 방에 똑같은 램프가 두 개 있다고 더 잘 보일까요? … 우리가 가진걸 이용하면 돼요. 경쟁이 필요 없죠. 하나의 느낌 다음에 또 하나의 느낌만 있으면 되니까. 맞아요. 가진건 적어도 가진 걸 더 잘 쓰면 되죠. 우린 아마 과잉에 목맨 병자들인가봐요.
그런데 끈으로 묶은 이 상자를 보니 마누엘라가 과자를 포장하는 박엽지가 떠올랐다. 그 종이도 세련됨보다는 투박함에 가깝지만 포장의 진지함이 엿보이는 정성 속에는 그녀의 진정성과 부합하는 무너가가 있었다. 아주 고상한 개념들은 아주 투박하고 하찮은 것에서 나온다. 아름다움 그것은 적합성이다.
그러나 다수의 지성인에게는 치명적인 오류가 내재돼있다. 그들은 지성을 하나의 목표로 생각한다. 그들 머릿속엣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들어 있다. 똑똑해지는 것. 정말 멍청한 짓이다. 그리고 지성이 목적이 될 때, 그것은 오작동을 일으킨다. 지성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그것이 산출하는 기발함과 간결함에 있지 않고 그 표현의 난해함에 있다.
지성은 신성한 재능이 아니라 영장류의 유일한 무기
쉬운 길은 항상 있었다. 내가 거기에 발을 들인 적은 결코 없지만, 나는 자식도 없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으면서 신도 믿지 않았다. 즉 삶이 인간에게 더 수우러하게끔 다져놓은 이 모든 오솔길을 걸은 적이 없다. 자식은 자신과 대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미루게 도와주며, 그 다음에는 손자 손녀가 그 역할을 이어 받는다. 텔레비전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우리 존재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획하고 기분을 전환하게 하는 소모적인 도구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농락해 생의 걸작을 남기지 못하게 정신을 날려버린다. 마침내 신은 포유류로서 느끼는 우리의 공포와 언젠가 이 즐거움이 끝나리라는 참을 수 없는 전망을 진정시킨다.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비수가 아니라 놀랍도록 재빨리 재치있게 답하는 감각, 그건 천부적 재능.
운명이 예상되지 않는 사람
내 삶을 부모의 정원이 아닌 다른 정원으로 가꿀 수 있을까?
내가 아무리 온통 달콤하고 지혜로운 가면을 쓴 어른들의 본 모습이 몸시 추하고 냉혹하다는 것을 안다 해도, 그리고 그들의 가면을 벗기려면 그 속마음을 간파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안다 해도, 그것이 이런 난폭함과 함께 일어나는 것은 고통스럽다.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자기 영혼을 맡기는 일은 아니니까.
나는 해야할 일은 오직 한 가지라고 믿는다. 우리가 죽기 전에 완수해야 할 과업을 찾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 일을 완성하는 것.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우리의 동물적인 본성 속에 신성이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만이 죽음이 우리를 데려가는 순간 우리가 건설적인 뭔가를 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가장 큰 분노와 불만은 실업도 가난도 아니며 미래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문화가 없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양립할 수 없는 문화들 사이에서 찢겨버렸다. 자기가 어디있는지 모르면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문화가 없으면 사람은 더 이상 문명화된 동물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움직임을 공간적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름다움이란 그것이 지나가는 순간을 우리가 포착하는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사물의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순간 일어나는 사물의 찰나적인 배열일 뿐이다. 아마 이것이 살아 있는 것이리라. 죽어가는 순간들을 추적하는 일.
욕망! 욕망은 매일 우리를 바로 어제 우리가 패한 전쟁터로 인도한다. 욕망은 우리에게 죽는 순간까지 정복이 곧 실현될 것이라 속삭인다. 그리고 반복되는 계획들을 제공하면서 우리가 현재 가지지 못한 것을 더욱 욕망하는 능력을 한껏 부추기다가 어른 이른 아침 시체로 가득한 풀밭에 우리를 방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찾지 않아도 되는 즐거움을 갈망하고, 결코 시작되지도 끝나지도 않을 어떤 행복한 상태를 꿈꾼다. 아름다움이 더는 목적이나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 자체가 되는 행복한 상태를,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