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ence, existence/1월 1일

2021년을 보내며

파랑파랑새 2021. 12. 26. 13:56

 

[1/4분기] 눈보라 속에서 치른 성인식

기상이 좋지 않던 1월의 어느 날, 혼자 겨울 한라산을 등산하다가 눈보라에 갇혔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하산을 했고 남은 소수의 사람 조차 서둘러 대피소로 향했기 때문에 나는 홀로 그 상황을 겪게 되었다. 동서남북은 물론 1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이정표는 눈밭에 파묻혀 나 같은 초행길 산객은 어디가 등산로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거센 눈보라에 걸어온 발자국마저 지워져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내 뒤 혹은 맞은편에서 걸어올지도 모를 누군가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람이 올 기미는 전혀 없었고 기상은 점점 나빠졌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결정을 해야 했다. 계속 누군가를 기다릴 것인지, 조난신고를 할지, 대피소를 찾아 발을 뗄지, 만약 발을 뗀다면 어느 방향으로 떼야할지. 나의 판단 능력을 믿고 발을 떼기로 결정했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거대한 해방감과 자유함이 찾아왔다. 

 

길이 사라진 하얀 눈 밭 위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나간지 한 시간 즈음 지났을 무렵 저 멀리 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피소에 가까워질수록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뭉클한 것이 차올랐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에서 오로지 나 자신에 의지해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겨울 한라산에서의 경험은 올 한해 통틀어 가장 의미있고 상징적인 사건이 됐다. 내 안의 힘으로 삶의 중요한 것을 회복시킨 단적이 경험이 된 것이다. 이런 내게 분석가는 '성인식을 치른 것 같다'고 했다. 

 

[2/4분기] 부모님의 큰 사고

4월, 부모님이 심각한 교통사고로 대학병원으로 호송됐다. 목재를 적재량 이상으로 싣고 가던 트레일러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언덕길에서 굴렀고 삽시간에 정차해 있던 아빠 차를 덮쳤다. 부모님 차는 트레일러에 깔린 채로 수십 미터를 끌려가다 가드레일을 뚫고 절벽 아래로 추락을 했다. 부모님은 의식 없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됐다. 

 

사고 현장에 있던 모두가 비관했지만, 천운으로 부모님의 의식이 돌아왔다.  정신적 외상(트라우마)과 길었던 입원기간, 힘겨웠던 회복 과정은 논외로 두더라도 어쨌거나 부모님께서는 심각한 휴유증 없이 회복을 하셨다. 어쨌거나 덕분에 우리 남매는 여느 해처럼 어버이날을 챙길 수 있었고, 부모님 생일을 챙길 수 있었으며, 여름에 함께 동해바다를 구경하러 갔고, 할머니를 모시고 단풍 구경을 갔으며, 여전히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잠들고 있다. 이 작고 사소한 일상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허락된다는 사실이 축복 같고 더할나위 없이 감사하다. 또한 우리 앞에 보너스처럼 허락된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행복하게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3~4/4분기] 많은 깨달음과 결심이 있었던 정신분석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는 나의 비겁함에 대해 냉정히 돌아봤다면, 올 하반기는 나를 둘러싼 '관계'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분석 과정에서 얻은 소기의 깨달음들은 결국 하나의 꼭지점으로 모였는데 그건 바로 부모님과의 관계(특히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양친이 모두 계시기는 했지만 그 분들은 나를 보호하기는 커녕 오히려 가해하는 대상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의지할 구석 하나 없이 불안하고 위태롭고 고통스러운 삶 한 가운데 내팽겨쳐진 혈혈단신'으로 감각했다. 평생 동안 부모, 특히 '아버지'의 빈자리를 타인(선생님이나 남자친구, 스승, 어른)으로 메우려 했으나 전부 부질 없는 짓이었다. 이제는 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아버지도 어떤 타인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그건 그저 내가 평생에 걸쳐 오롯이 품고 가야 하는 나만의 문제라는 사실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부모님만큼이나 어려운 주제는 송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만난 송은 나에게 '생애 첫 경험' 그 자체였다. 송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안전함을 느꼈고, 사랑을 흠뻑 받아보았고, 흠뻑 사랑했고,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송과 있을 땐 근심도 걱정도 없이 푸른 들판에 누워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행복이 커질 수록 불안 역시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나는 생전 처음 마주한 거대한 불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고 불편한 감정들을 그 친구에게 쏟아냈다. 소중한 관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많은 것들을 했지만 동시에 해야만 했던 많은 것을 하지 않았다. 내 삶에 남겨진 그 친구의 흔적과 수많은 감정(죄책감, 미안함, 그리움, 고마움, 애틋함 등)앞에서 나는 여전히 헤매지만 그럼에도 생애 가장 소중했던 이를 잘 떠나보내려고 애써 노력한다.  

 

나의 오래된 생존전략과 아킬레스건(돈에 대한 미숙함과 분노, 안전에 대한 갈망, 타인을 모사하는 삶 등)이 수면 위로 떠올라 명확히 그 실체를 드러냈다. 30년 동안 살아오던 방식으로 살 것인가 혹은 과거의 방식을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 것인가, 만약 다른 방식으로 산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해야 하는 순간들이 밀물처럼 계속 밀려들었다. 마른 우물 같던 내 마음 안에서 처음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말아야겠다'는 목소리가 올라왔고, 부모님에게 나의 비겁함을 고백하고 사과했으며, 분석가와 부모님에게 과거의 생존방식을 버리겠다고 결단하고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책임과 윤리, 삶의 태도에 대한 화두들이 생겼다.

 

올해의 마지막 세션에서 분석가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약함와 악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들려주며 '약함에 근거한 선함은 위선'이라는 피드백과 함께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라'는 화두를 던져 주었다.

더디기만 한 송과의 이별에 대한 분석가의 코멘트도 덧붙인다. 그 분의 첫 마디는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됩니다.' 였다. 

 

[그 밖의 이슈]

- 술을 끊었다. 건강검진 결과는 굿.

- 물론 연애는 하지 않았다. 

- 생애 가장 긴 머리를 유지하는 중. 살이 좀 쪘다.

- 연초에는 제주 여행을, 여름에는 강원도 여행을 갔다. 친구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감바스 알 하이요가 소울푸드가 됐다

- 강의를 하게 됐다. 종강 이후 여러 아이들이 달려와 포옥 안겼던 기억이 가장 좋았다. 

- 사업 5년차. 어찌저찌 죽음의 계곡을 넘어갔다. 가장 큰 금액의 계약을 했고, 일하는 노하우가 이제야 생겼으며,  창업 초기부터 믿고 지지해주었던 대상과 작별하였다. 친구와 신규 사업을 시작했으나 진척도 소득도 없었다. 

-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새로 시작했고 체육관에 등록했다. 

- 에리히 프롬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서른 두 살의 목표]

- 제작년, 작년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않는 것.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공부를 잘 마치는 것. 3번째 단계의 인생을 잘 계획하는 것.    

- (만약 코로나가 소강되면)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다녀오는 것.

- 부상 없이 체육관을 꼬박 꼬박 다니는 것.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 부모님으로부터 잘 독립 하는 것.

- 정신분석을 잘 마치는 것. 

- 토익 점수.

- 다큐멘터리를 잘 제작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