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보내며
16년, 만남과 이별을 수차례 반복했다.
만난지 500일이 됐을 때 반지를 맞추는 문제로 싸우고 울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자와 커플링을 하지 않았었지만, 그 친구와는 반지를 나눠 끼고 싶었다.
반지 공방에 갔는데 품질에 비해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몇 군 데의 악세서리 가게, 귀금속 가게로 발을 돌렸다.
상대가 중저가 악세사리 브랜드에서 개 당 3~4만원 정도의 은반지를 맞추자고 했는데,
나는 개 당 15~18만원 정도 하는 반지를 맞추고 싶어했다.
결국 우리는 반지를 사지 못했다. 둘 다 많이 울었다.
내가 자주 그리고 많이 아팠고, 그래서 극도로 예민하고 우울한 상태가 지속됐다.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정말 몸을 칼로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병원을 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병원을 다녀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원비로 나가는 돈도 돈이었지만 무엇보다 몸이 빠르게 망가졌다.
항생제 내성으로 약이 듣지 않았고 사용할 수 있는 항생제가 하나씩 없어졌다.
쉽게 취급하지 않는 항생제를 구하기 위해 여러 약국을 전전했다.
너무 무서웠다. 나중에 항생제가 듣지 않아 수술을 할 수 없거나
(혹여 살다가 아이를 낳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아이를 낳을 수 없을까봐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다.
분명히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닌데, 내가 혼자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아파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는데 상대방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상대방은 노력한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숙하게만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병원을 가지 못한 채 출근을 해 이를 악물고 일을 하고,
퇴근 시간 이후 까지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 전전하고, 약은 구하기도 어려워지고, 그마저도 약이 들지 않아 통증은 계속 되고,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한 달에 2~3주를 항생제를 달고 살게 되는 날들이 열 두 달 계속 됐다.
억울했다.
그래서 자주 싸웠다. 내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 상대는 자신도 너무 힘들다고 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속상한 날이 계속 됐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잠수를 탔다.
그러면 연락을 받지 않는 그 친구 집으로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나중에는 내가 그를 찾아가도 연락을 받지 않고 얼굴 조차 볼 수 없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것이 때로는 분했다.
나는 며칠 동안 줄곧 아팠는데, 바득바득 버티며 일하고 퇴근하자 마자 부랴부랴 병원을 갔는데,
밥 한끼도 제대로 못 먹고 상대를 달래러 갔는데, "나도 힘드니 혼자 있고 싶고 널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
중요한 것이 붕괴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우리 공동의 일로 겪는 일이니 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지. 나도 같이 해결할거야,
아플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밥부터 먹자, 같은 것들.
내가 말했다. "난 너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어.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해."
그러면 그가 말한다. "사실 그런 말 이젠 지긋지긋해. 그 말 한다고 이 상황이 끝나? 진짜로? 어짜피 넌 그 말로 만족 못할거잖아."
그러다 어느 날은 이렇게 말했다. "넌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정신과에 가서 처방 받으면 다시 만나는걸 생각해볼게."
너무 내 입장 위주로 적었나 싶어 그의 입장에서 변을 달자면 이렇다.
올해 그는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오죽하면 '집중이 잘되는 약'을 처방받아 먹으며 공부를 지속했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학점을 끌어올려야 했으니 절박했을 것이다.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누워서 지낼만큼 그 친구도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계속 아프고 딱히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시간이 계속 되니 답답했을 것이다.
우울한 환자를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할 짓이 못 되니까...
직장 내 사수를 비롯해 특정 동료와의 불화가 심했다.
특히 없는 말을 지어내 이간질을 시키는 사수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고,
그 분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는 바람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사수가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바람에 내게 적의를 표출하는 동료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중심으로 나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까운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참고 무시했지만 화가 많이 나고 억울했다.
내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졌던 이가 있었다. 아주 외롭고 쓸쓸한 날에 감정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
순대국밥집 앞에서 이별을 한 날 (나는 그 날 아주 많이 아팠다. 병원을 다녀온 직후의 만남.),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천변이 내려다 보이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는데
그 때 그 이에게 전화가 걸려왔었다. 울었냐고, 무슨 일이냐고, 어디냐고, 내가 지금 가겠다고.
그는 아주 먼 타지에 살았다. 그 마음과 그 말이 고마워서 눈물이 마구 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와 그는 기본적으로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서로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게 그는 그저 좋은 친구고 오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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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새해에 그의 첫마디는 '사랑한다'였다.
올해 내가 처음으로 듣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면 내가 그에게 처음으로 했던 말은 '안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