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은 자유
착각은 짧고 오해는 길다.
그리하여 착각은 자유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응답하라 1988>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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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이와의 관계 속에서 나보다는 그 이가 나를 더 필요로 한다고 믿고 있었고
따라서 내가 관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고 고로 아쉬운 소리를 먼저 하더라도 내가 먼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즉 알았으면 좋았겠으나 그것은 아주 놀랍고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 이는 '우리 둘 사이에 있는 지금의 거리가 우리에게는 최상이라고 생각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내게 전달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었던 그와는 달리, 그 말을 듣는 순간의 나는 아주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간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던 상황들이 명료하게 정리됐고
내가 얼마나 독선적인 착각 속에서 그 이와의 관계를 제 멋대로 받아들였는지가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 망할 영화, 이병헌 씨에 대한 이야기, 어느 날의 술 주정에서 받았던 묘한 불쾌감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번뜩 깨달았다.
나란 사람은 그에게 one of them이지, the only one은 아니라는 사실.
나란 사람은 지금 당장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에 그나마 제일 나은 옵션인거지, 그냥 나란 인간 자체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하지만 그가 내게 건넨 말들은 구구절절 옳았고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것일게다.
지금의 상황을 자초한 장본인은 나이며 누구 탓을 해서도 안된다.
부족하고 이기적인 나와 부딪히고 치이는 과정에서 이미 마음이 닳고 닳았을테고,
몇 번이고 애써 용기낸 이야기를 꺼낸 순간들도 내가 차갑게 꺾어버렸으면서
지금와서 '너의 말에 내가 상처 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유아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그의 반응에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의 말로써 그와 가까워질 가능성이 차단된 셈이고
그게 나란 사람을 놓고 봤을 때도 이성적으로도 좋은 일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픈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