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파랑새 2021. 2. 18. 20:04

 

 

(이 글은 최근 아주 감사하고 만족스러웠던 하루에 대해 촘촘히 적어둔 신변잡기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씻고 10:11분 기차를 탔다.

출발이 조금 늦어져 전 날 예매해두었던 차편을 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게도 그 기차를 탈 수 있었다.  

KTX가 매진인 관계로 무궁화호를 예매했는데 4호차 객실에 여유가 꽤 있었다.

덕분에 바깥 풍경을 보며 글을 쓸 수 있었는데  마침 좋아하는 노트와 만년필, 이어폰이 가방 안에 있어 가능했다.

서울에 가는 두 시간 동안 그간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고, 숨을 가다듬었고, 마음을 천천히 돌아보았으며, 글을 썼다.

 

따듯하게 기억되는 풍경이 한 조각 있어 덧붙인다.

객실 안으로 한 젋은 남자가 들어와 승객들에게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고양이를 잠시 봐줄 수 있는지 물었고

한 여자분께서 흔쾌히 그러겠노라 하였다.

천가방에 들어가 있는 아기 고양이는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진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 여성 승객은 고양이가 놀랄 것을 걱정한 까닭인지 천가방 안에 들어가 있는 아기 고양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고양이 주인은 곧 객실로 돌아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시 고양이를 안고 객실 밖을 나섰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렸다.

객실 창문 밖으로 외투를 여미고 우산을 쓰고 황급히 걷는 사람들의 모습, 여기저기 쌓이기 시작한 눈들이 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역시나 눈이 많이 내렸는데 다행히 날이 추워 눈이 녹지 않아 우산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고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로 향했다. 

 

 

 

 

평일 점심시간이어서 라이브러리는 평소보다 더욱 조용했고, 눈이 와서 또 다른 맛의 운치가 있었다. 

평소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1층과 3층도 둘러보고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지난 번에 읽다만 책을 한 챕터 더 읽고, 두 권의 사진집을 들여다 보았다. 

이 공간은 어떻게 올 때 마다 감동스러울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따듯한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분석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우드앤브릭(wood & brick)으로 향했다.

아메리카노에 좋아하는 빵 하나를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평일의 삼청동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내가 주로 보던 주말의 화려하고 분주한 모습과는 또 다른 삼청동의 일상이 왠지 모르게 친근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빠듯하게 가게를 나섰음에도 다행히 분석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분석가에게 근 한 주 간 있었던 4가지 덩어리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정말 삼십분 남짓을 쉼 없이 말하였다.

첫째는 몸, 둘째는 공간, 셋째는 남자들과의 관계, 넷째는 같은 취미생활을 하는 동생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분석가는 하이데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며

자기 생각에는 오늘의 네 가지 이야기가 모두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되고, 

내가 '깨어있는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에 따듯하고 뭉클한 것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는 '한라산'에 대한 것이었다. 

분석가는 내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준 뗏목이 고맙다고 해도 그걸 짊어지고 갈 순 없지 않느냐'며 몇 가지 우화를 이야기해주었다.

분석이 끝난 뒤, 왠일인지 분석가는 서촌에 있는 '돈까스 맛집'을 소개해 주며 자신이 주로 먹는 메뉴를 알려주었는데

그 메뉴명이 너무도 귀엽고 흥미로워서 저녁을 먹고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식당 오픈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서촌의 곳곳을 산책하였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들어가보지도 않았을 가게에 들어가서 점원과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 이는 코로나19로 인해 서촌의 상권이 많이 죽었고 사장님이 가게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추위에 손가락과 발가락의 감각이 점점 무뎌졌지만 골목 골목을 돌수록 머리 속은 단순하고 상쾌해졌다.

그리고 만난 뜻밖의 선물. 놋그릇 가지런히. 

인테리어 잡지에서 이 건물을 소개한 기사를 읽은 뒤로 나는 살고 싶은 건물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마다 이 곳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지호가 내게 이곳에 가자며 사진을 보여줬을 때 까무라치게 놀라며 '이런 우연이 있냐'며 기뻐했던 기억이 났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어 아빠에게 "아빠, 글쎄 제가 지금 어디에 있는줄 아세요?"라는 메세지와 함께 보냈다.

 

 

 

 

한시간의 서촌 산책 후에 드디어 마주한 이 녀석. 녀석의 이름은 '촉촉까스'다. 

분석가는 "드셔보시면 왜 촉촉까스인지 알게 된다"고 하였는데 정말 말 그대로였고 굉장히 맛있었다. 

마치 돈까스로 만든 유린기를 먹는 기분이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 건물을 빠져나와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길에 본 밤의 풍경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 풍경을 보며 나도 모르게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하였다. 

서른 한 해 동안 '사는 것은 고(苦)'라고 생각해왔던 내가, 사는 것이 즐겁고 축복같고 설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만큼 운 좋은 일도, 감사할 일도, 행복한 일도 많았던 하루였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