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파랑새 2019. 9. 27. 04:01

 

지난 여름, 이종희 선생님의 정성스러운 식사기도를 듣다 맘이 찡해진 적이 있었다. 이후 기억을 더듬어 생각나는 몇 구절을 검색해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세상에는 참 다양한 식사기도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찾아낸 몇 가지 식사기도문은 아래에서 소개하였다.)

 

시대와 지역, 종교와 문화를 떠나 모든 식사기도문이 공통적으로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감사'다. 밥 한톨이 밥상 위에 올라오기 까지 수백일의 햇살, 비와 바람, 흙, 사람 등 다양한 존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식적인 자각, 그러한 일렬의 것들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오는 감사함 말이다. 일부 식사기도문에는 추가적으로 이런  '감사한 식사'가 나의 몸에 약이 되듯 나 역시도 세상에 양분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덧붙기도 한다. 

 

식사기도를 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생명의 연쇄에 대해 묵상하고 그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나'를 생각하는 모습이 마치 일상 속 작은 명상(혹은 수행)처럼 느껴진다. 와인을 마신 뒤 다음 잔을 마시기 위해 물로 입을 헹구는 것처럼, 탱고의 곡과 곡 사이에 들어가 있는 꼬르띠나처럼, 어쩌면 정말로 하루 세 번의 식사시간을 자칫 산란할 수 있는 하루의 중간 중간에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게끔 하는 고마운 시간으로 쓴다면 좀 더 행복하고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만들어본 나만의 식사기도문.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꼭 식사기도를 하는 짬을 가져보고자 한다. 

"온 우주와 하늘과 땅, 생명들이 수고로움으로 빚어낸 밥상을 약으로 삼아 천천히 씹고 공손히 삼키겠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하고 세상에 더 많은 이해와 존경, 사랑을 베풀겠습니다."

 

 

[덧붙임] <다양한 식사기도문>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 오관게(五觀偈)

 

이 때, 그 뜻은 다음과 같다.

① 이 식사가 있기까지 공이 얼마나 든 것인가를 생각한다,

② 자기의 덕행이 공양을 받을 만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③ 마음을 지키고 허물을 여의는 데는 삼독(三毒)을 없애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음을 관한다,

④ 밥 먹는 것을 약으로 여겨 몸의 여윔을 방지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관한다,

⑤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공양을 받는 것임을 관한다 등이다.

 

 

 

이 음식은 온우주와 하늘과 땅과

헤아릴 수 없을만큼의 수많은

수고로움이 가져다 준 선물이니,

 

내가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면서 먹게 하소서,

 

이 음식에 예를 올리고 이 음식으로

이어지는 나의 생명이 감사하면서

먹게하소서,

 

항상 눈이 입보다 크다는 것을 명심하여

적당한 양만 먹게 하소서,

 

이 음식을 먹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존경하며 사랑이 충만해지도록 하소서!

- 퇴계 이황

 

 

 

한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민의 은혜가 깃들어 있으며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은혜로운 음식을 감사히 먹고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겠습니다. 

- '상도선원' 공양게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 

하늘과 땅을 통해 베풀어주신 

귀한 음식을 감사히 먹겠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 심도학사 식사 기도문

 

 

 

지금 여기 이 밥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이 담겨 있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하소서.
우리의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며 식탐하지 말게 하소서.
천천히 씹어 공손히 삼키겠습니다.

- 강원도 화천 '시골교회' 식사기도문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주님을 모시듯 밥을 먹어라

햇빛과 물과 바람, 농부까지 그 많은 생명

신령하게 깃들어 있는 밥인데

그렇게 남기고 버려 버리면

생명이신 주님을 버리는 것이니라

사람이 소중히 밥을 대하면 그게 예수 잘 믿는거여


밥되신 예수처럼 밥되어 살거라

쌀 보리 밀 옥수수 물고기에 온 만물들은

자신을 제단위에 밥으로 드리는데

그렇게 사람들만 밥되지 않으면

어느 누가 생명 세상을 열겠느냐

사람은 생명의 밥을 먹고 밥이 되어 사는거여

- 이현주 목사 <밥 먹는 자식에게>

 

 

아래는 식사기도문은 아니지만 밥과 관련된 시와 인터뷰 내용을 옮긴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 <밥> 김지하

 

 

 

"해월 선생이 이런 말을 했어, 밥 한사발 속에 우주가 있다고. 밥 한사발 알면 다 아는 거라고. 대단한 얘기지. 그게 있었으니까 3.1만세도 된 거라고. 기독교? 아니야. 동학이 있었기 때문에 3.1만세가 가능했던 거야. 해월 선생은 또 식사를 하기 전에 식고를 하라고도 했지. "이제 들겠습니다." 하고 밥을 영하라는 거야. 우주를 영하라는 거지. 낟알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도 우주 전체가 있어야 돼. 공기만 가지고, 물만 가지고 낟알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 낟알이 곧 우주요, 밥이 곧 우주 아닌가. 엄청난 거야." 

-1990년 5월 옵서버지 인터뷰 중에 장일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