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시인의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나무의 꿈>
어버이 날,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망고 튤립 몇 송이와 손택수 시인의 <붉은빛이 여전합니까>를 선물하였습니다.
여러가지를 두고 고민하다 이 시집을 고르게 됐는데, 제가 좋아하는 시가 실려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였습니다.
저는 손택수 시인의 시 중에서도 특히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를 좋아합니다.
이 시를 통해 손택수 시인을 알게 되었고, 또 마음이 벅하고 힘겨웠던 시기에 위로 받았기 때문일겁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저는 제가 마치 5월 초입의 맑은 날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맑고 파아란 하늘, 일렁이는 초록잎의 나무와 그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 그늘에서 즐기는 산뜻하고 시원한 바람...
그 속에 가만히 누워 나뭇잎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요.
그렇게 일상 속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곤 합니다.
때문에 손택수라는 이름을 들으면 저는 가장 먼저 5월의 풍경을 떠올립니다.
이어서 생각하는 것은 나무입니다.
저는 그 분이 나무를 소재로 삼아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참 좋습니다.
꼭 시 속에 나무가 등장하지 않아도 시인의 시를 찬찬히 읽다보면 마치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곤 합니다.
얼마 전 광주 양림동에 다녀왔는데, 한 고등학교 뒷편 나무 그늘에서 손택수 시인의 시를 보았지요.
5월의 어느 날, 푸른 나무 그늘 아래 걸린 손택수 시인의 <나무의 꿈>을 보며 참 잘 어울린다 싶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나지막히 낭독도 해보았습니다.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
손택수
멀리 여행을 갈 처지는 못 되고 어디라도 좀 다녀와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을 때
나무 그늘 흔들리는 걸 보겠네
병가라도 내고 싶지만 아플 틈이 어딨나
서둘러 약국을 찾고 병원을 들락거리며
병을 앓는 것도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을 때
오다가다 안면을 트고 지낸 은목서라도 있어
그 그늘이 어떻게 흔들리는가를 보겠네
마흔 몇 해 동안 나무 그늘 흔들리는 데 마음 준 적이 없다는 건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는 얘기처럼 쓸쓸한 이야기
어떤 사람은 얼굴도 이름도 다 지워졌는데 그 눈빛만은 기억나지
눈빛 하나로 한 생을 함께 하다 가지
나뭇잎 흔들릴 때마다 살아나는 빛이 그 눈빛만 같을 때
어디 먼 섬이라도 찾듯, 나는 지금 병가를 내고 있는 거라
여가 같은 병가를 쓰고 있는 거라
나무 그늘 이저리 흔들리는 데 넋을 놓겠네
병에게 정중히 병문안이라도 청하고 싶지만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나무의 꿈
손택수
자라면 뭐가 되고 싶니
의자가 되고 싶니
누군가의 책상이 되고 싶니
밟으면 삐걱 소리가 나는
계단도 있겠지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다락방
별빛이 들고 나는 창문틀도 있구나
누군가 그 창문을 통해 바다를 생각할지도 몰라
수평선을 넘어가는 목선을 그리워할지도 몰라
바다를 보는게 꿈이라면
배가 되고 싶겠구나
어쩌면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아궁이 속 장작으로 눈을 감을지도 몰라
잊지 마렴 한 줌 재가 되었지만
넌 그 때도 하늘을 날고 있는거야
누군가의 몸을 데워 주고 난 뒤
춤을 추듯 피어오르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다만 내 잎사귀를 스치고 가는
저 바람소리를 들어보렴
너는 지금 바람을 만나고 있구나
바람의 춤을 따라 흔들리고 있구나
지금이 바로 너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