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한 날들이 다시 찾아오고
1. 나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이 냉정하게 조언했다. 헤어지라고. 분석가는 상대방이 '중요한 순간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 나도 용납해서는 안되지만 무엇보다 그 이가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고, 태성오빠는 사건의 전말을 전부 듣기도 전에 '그 순간 당장 헤어졌어야지'라고 말을 했다. 술을 마신게 아니라 제 정신에서는 할 수 없는 실수라고. 연애할 준비가 안 된 사람이라고. 개방적이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남동생 역시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결코 해서는 안되는 실수'라고 생각한다며 헤어지는게 낫지 않겠냐는 조언을 슬그머니 들이 밀었다.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보고 범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 챈 주변의 가까운 남자사람들 중 몇몇은 애써 꼬치꼬치 상황을 캐묻기도 했는데 그들은 나보다 더 크게 분노하며(나 대신 분노를 해준 것일 수도 있다) '그런건 실수라고 하는게 아니다'라며 펄쩍 뛰었다. 왜 도대체 그 상황을 참고 있냐고, 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거냐고(이해할 가치가 없는 사건이라고), 네가 정말 중요했다면 그 순간 그렇게 대처하면 안됐다고, 그건 '몰랐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고등학생이면 이해해볼 여지가 있으나 그는 30대라고. 송과의 연애에서 괴로워했던 2018년, 준기가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던 말이, 용규가 '피눈물이 난다' 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하는 조언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2. 남자친구와 이미 담판을 지은 사건인데 나는 왜 이리도 괴로워하고 있는가. 지나간 일을 지나간 일로 여길 수는 없을까. 기왕 그를 믿기로 결심했으면 깨끗하게 과거의 시간들을 묻고 넘어가주면 안되는 것일까. 나는 그의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상처 입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짜증을 내며 (잠재적으로 상처를 줄) 행동이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것이 내가 그에게 주고 싶은 '깨끗한 사랑'은 더더욱 아니지 않은가. 조금 더 크고 너그러운 맘으로 그를 품어 안을 수는 없을까. ㅡ 그에 대한 짜증과 분노, 속상함, 억울함, 의심,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비참함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앞선 생각들을 하며 괴로워 한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어떻게 행동하던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나는 내가 믿는 사랑의 형태로 우리의 끝이 어떤 모양일지는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너무 괴롭다.
3. 하필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 우습게도 나는 그에게 생일 축하 한다는 말을 건네고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사건을 언급하며 다시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나는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인가. 하루 정도는 상대방을 맘 편하게 해줄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냥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했다. 행복하자고 연애를 하는건데 우리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과거의 시간에서 허덕이고 있나. 내가 그토록 축하하고 싶었던 그의 생일인데, 한 달 가까이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고민했었던 순간이 바로 지금인데, 왜 난 기분이 완전히 구겨진채로 그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고 마는가. 그토록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가 쉽게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눈물이 펑펑 났다. 과연 이 구겨진 마음을 활짝 펼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 같아 겁이 났고 우울해졌다.
4. 나는 이 사건을 감당할 수 있는가. 만약 자신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만 두어야 할까? 그렇다면 당장 오늘 그의 생일도 축하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은가. 그리고 며칠 동안 마음을 관찰하고 다시 싱글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해야 하는가. 속이 울렁울렁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