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선생님께
그리운 선생님!
문득 이 새벽에 선생님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뵌 것은 1999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저희의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셨고, 저희는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였습니다. 선생님은 머리가 하얗게 센 다정하고 온화한 할아버지셨습니다. 큰 키에 살이 찌지도 마르지도 않으셨고 늘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는 기품이 있었습니다. 사각형 안경 너머로 흘러나오는 깊고 단단하고 따듯한 눈빛들도 여전히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저를 기억하셨을까요? 만약 그러셨다면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계셨을까요?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선생님께서 학생들과 교실 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은 채-어떤 친구들은 선생님 무릎 위에 앉아-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모습이었습니다. 교실에 선생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 모든 아이들이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기에 여념이 없었지요. 선생님은 이야기 보따리 그 자체셨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 보따리에는 도깨비, 호랑이, 망태 할아버지, 온갖 귀신, 온갖 다양한 사람과 동물 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이 모두 소리를 지르거나 조바심에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고, 귀신이 등장하면 함께 무서워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대목에서는 다 같이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시계를 계속 훔쳐보곤 했습니다. 뒷 이야기를 미처 다 듣지 못하고 수업시간이 끝나버릴까봐 조바심이 나서요. "다음에 이어서 이야기 해줄게요"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아쉬워 때로는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시무룩해지기도 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낙으로 학교를 다녔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저에게 '연필을 참 예쁘게 쥔다며' 칭찬해주셨던 것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살면서 들은 칭찬 중 가장 잊혀지지 않습니다. 숫기도 없고 한껏 위축되어있던 저에게는 난생 처음으로 제 존재를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날 이후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연필 잡는 연습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참으로 따듯하고 진심 어린 칭찬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의 그 따듯한 눈길과 사랑이 가족과 학교 모두에 마음 붙이지 못하던 아홉 살의 시절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 너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은퇴 소식을 듣고 복도에서 선생님 다리를 붙잡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 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이 선생님과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제 아홉 살 생애 그토록 슬픈 일은 없었습니다.
22년이 흘러 이제는 제가 학교 안팎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유난히 저를 잘 따르기도 하거니와 저와 함께 수업을 하고 나면 아이들이 생기 있고 밝아진다며 주변에서 많이 부러워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제 천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제가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는 방식이 선생님께서 저를 대하셨던 방식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따듯하게 눈맞추고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안부를 묻는 것,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각각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들을 발견하는 것, 친구가 되는 것, 귀하게 대하는 것, 아이들을 보면서 배우고 겸손해지는 것. 이것이 본디 제 것이 아니라 실은 선생님을 비롯해 이후에 많은 스승들로부터 유래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압니다. 돈을 주고도 배우지 못하는 귀한 것을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살겠습니다.
한 가지 또 깨달은 것은 제가 아주 오래도록 선생님을 이상적인 '어른'의 상(相)으로 생각하며 그리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스승으로 따랐던 분들은 모두 선생님의 모습을 닮은 분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아주 오래도록 선생님이 아홉 살의 저에게 주셨던 것들을 그리워했었던 모양입니다. 제 마음 속에서 부모님의 빈 자리를 아주 오래도록 대신해주셔서 삶의 위기 앞에서 더 크게 무너지지 않고 잘 일어섰습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그립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 길 없지만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기를,
몸과 마음에 평화가 가득 깃드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