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하여 (feat.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분석을 받는 경험이 쌓일수록 나 자신에 대한 실존적 이해만큼이나 경복궁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들에 대한 이해 역시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요 근래 문득 깨달았다.
살면서 이렇게나 면밀히 들여다 본 공간이 있었던가? 이렇게나 규칙적으로 산책하는 공간, 구석구석 걸어다니며 여기저기 눈길을 주었던 공간이 있었나? … 여태껏 관계 맺어왔던 공간들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간 내가 공간에 대해 참으로 무관심했으며 이제부터는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공간과도 새로운 관계 맺음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에서 좀 더 친해지기 위해 자주 발걸음을 하는 공간들이 생겼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북촌에 위치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다. 이 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카피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이 앞선 질문들의 출발이 되었던 것 같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이러했다.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직접 보니 훨씬 인간미 있네', '북촌에서 받았던 인상이 응축되어 있는 건축물 같아', '지독하게 현대카드(2010년대의 현대카드라고 정확하려나?)스럽군', '이 모던한 하얀 건축물은 굳이 북촌이 아니더라도, 바닷가든 산골짜기 어귀든, 도심 한복판이든, 그 어디에 두어도 잘 어울리겠어', '시간의 풍화 속에 조금은 비껴나있겠다'.
짐을 맡긴 뒤 라이브러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진열과 배치 하나까지도 '그냥'이 없구나', '공간 속으로빛이 깊숙히 들어와서 그런가 다소 엄격하고 뻣뻣하게 느껴질 법도 한 공간이 따듯하고 편안하게 데워지는 기분이다', '큐레이션 수준이 굉장히 좋고 한 권 한 권의 책들이 다 귀하게 느껴진다', '의자 종류, 채광, 실내조명 등이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어 아주 자연스럽게 편안하고 행복한 책 읽기가 가능하겠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오래 머물다보면 이 공간과 같아지겠구나'.
예전에 현진이 평창에서 일을 그만 두고 내려오면서 했던 이야기가 있다. "내가 함께 일하며 어울리는 사람들과 환경이 곧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 일을 그만둘 결심이 금방 섰어." 그 뒤로 현진은 보령으로 갔고 대전으로 돌아왔으며 그 때 마다 자기가 머무를 환경을 주체적으로 선택하였다. 오늘의 나는 그 당시 현진의 나이가 되었다. 당시에는 얼핏 무모해 보였던 현진의 모습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 때의 현진처럼 공간에 대한 고민과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방문했음에도 여전히 이 곳은 나에게 "너는 어디에 있을 때 행복하고, 창의적이고, 안식하는가"하는, 동시에 "요즘의 너는 어떤 공간과 함께 하는가?", 일상생활 속에서 주로 머무르고 만나는 공간들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고 있는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독려한다. 좀 더 주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다양한 공간과 관계 맺으라고. 내가 머물고 내 삶을 세울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탐색과 연구를 놓지 말라고. 그것에 있어서는 조금 더 발칙하게 욕심부려도 괜찮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