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confession
어제의 면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의 고백(confession)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부모님의 빈 자리를 교수님과 선생님으로 채워 넣었다. 그 분들께 갖고 있던 감정은 품위있는 인간·어른을 향한 존경심이나 감사함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받지 못했던 따듯하고 안전한 사랑을 두 내외 어른을 통해 받고 싶어했다. 때로는 맘 깊은 곳에서 인정받고 싶어했고, 도움이 되고 싶어했고, 응석받이 딸처럼 굴고 싶어했다. 교수님의 일에 두 손 두 발 벗고 나선 데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잔뜩 섞여 있었고, 작년에 두 분이 차례로 수술을 받으셨을 때 느낀 불안함 밑에는 따듯한 둥지같은 존재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한 마음을 두 분께 처음 고백한 자리였다. 내 맘대로 부모님의 빈 자리를 두 분으로 채워 넣었다고, 힘겨운 시간에 두 분께 마음으로 기대고 의지했다고, 때로는 인정받고 싶었고 정당하지 않게 실망했고 탓했고 질투했고 응석부리고 싶었다고, 두 분을 닮고 싶어 흉내내기도 했었다고. 선생님은 길고 따듯하게 안아주셨고, 교수님은 특히 나의 어떤 말(언젠가는 스승의 자리를 넘어서 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던 이야기)에 대한 피드백을 길게 주셨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스승의 삶을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삶의 부피가 일정하다고 할 때) 때론 나의 삶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스승의 삶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하는 것이라고, '나의 삶'이란 것 조차 결국 누군가의 삶과 말에 영향을 받고 구축되는 것(그런 의미에서 말과 글은 '공공재')이라는 것,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엄하게 몰아붙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최근 내린 직업적 선택에 대해서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찾은 답을 침착하고 섬세하게 들어주셨다.
본래 목표했었던 내용을 전부 고백하지는 못했다. 일부는 말하는 과정에서 일부 생략했고 축약했다. 어떤 것들에 대해선 끝까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많은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했던 순간에는 적당한 표현을 고르기도 했다. 비겁하지 않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지만 때때로 비겁했다. 하지만 첫 술에 어떻게 배부를 수 있을까. 점점 살면서 바꿔나가면 될 것이라 본다. '선언'도 중요하지만 내가 한 선언을 삶으로 증명하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고 엄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미처 꺼내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그것이 어떤 내용일지를 이미 다 짐작으로 알고 계실테지만 그 서툴기 그지 없는 성찰과 극복의 과정을 지켜봐 주시는 두 어른께 정말 감사드린다.
여담1. 가는 길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돌아올 때는 마음이 약간 가벼워졌다.
여담2. 스물 아홉 살, 교수님께 처음 드렸던 질문이 기억난다. 대전시민대학에서 열린 강좌에서 였다. '사는 것이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시간이 지나면(나이가 먹으면) 짙은 안개가 걷히고 제 발치 정도는 선명하게 보일 줄 알았는데, 그리고 세상사에 대해 점점 더 명료하게 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안개가 빽빽하고 짙어 지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믿고 살아왔던 수많은 기준-옳고 그름의 판단, 정당함과 부조리에 대한 판단 같은 것들- 에 대해서도 점점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판단도 어려워집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을 듣고 교수님은 많은 공감-당신 역시 여전히 어려운 문제라고-을 해주셨고 당신은 매일 매일의 수련과 꾸준한 공부가 그래서 필요한 것 같다고 말씀 해주셨다.
여담3. 내가 교수님 시대에도 취업난이 있었는지 묻자 교수님께서는 '바닷물'에 비유해 설명을 해주셨다. 어떤 시대고 취업난은 있었다고. 바닷물로 꽉 차 내 몸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하나 없어 보이지만, 막상 비집고 들어가려고 맘 먹으면어떻게든 하면 비집고 들어가지더라고. 살아지더라고.
여담4. 이번 대선이 걱정되신다고. 나 역시도 그러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동생과는 크게 부딪혔다.